*유래와 전설*

당금애기 신화 2

아리솔솔 2009. 8. 22. 12:57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당금애기와 시준(세존)님의 결연이 성취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서는 동해안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 한 가지만 소개함. ^^*)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난 시준님은, 눈빛으로 저를 잡는 당금애기를 외면한 채 아무 일도 없던 듯 길을 나섰다. 해몽이나 해달라고 붙잡는 당금애기의 청에 귀한 아이를 낳을 꿈이니 아이들을 낳거든 부디 잘 키우라는 벼락같은 한마디만 남긴 채.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오고 아홉 오라비들이 돌아왔다.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앞을 가렸다.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긴 터였다. 갑자기 밥에서 비린내가 나고 물에서 흙내가 나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고 개살구나 능금 같은 신 것만 자꾸 먹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슬금슬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당금애기가 애써 그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한 울타리 안에 사는 가족을 끝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해산날이 다가오던 어느 날 당금애기는 오라비들한테 부른 배를 들키고 말았다. 오라비들은 노발대발하고 부모는 대경실색했다.

 “우리가 너를 보배처럼 꽃처럼 사랑했는데 어찌 이렇게 우리를 배반한단 말이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이처럼 슬프지는 않으리라.”

 당금애기가 겨우 입을 열어 전날의 일을 고해봤지만 노여움만 더할 뿐이었다.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야!”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홉 오라비가 달려들었다.

 “씻지 못할 죄를 지었으니 이 세상 떠나는 걸 조금도 서러워 마라.”

 오라비들은 칼을 쳐들어 당금애기를 치려하였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팔이 올라가기만 할 뿐 내려가지를 않았다.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칼을 내려보았지만 자루만 남고 칼날이 뚝 부러졌다. 울음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나섰다.

 “얘들아, 이 아이가 옳고 그른지는 하늘이 알 일이다. 이 아이를 뒷산 바위 돌구멍으로 보내자꾸나. 죄가 없으면 하늘이 살리고 죄가 있으면 벌을 내릴 테니 말이다.”

 아홉 형제는 솔개가 병아리를 채듯 당금애기를 훌쩍 채가지고 뒷산으로 향했다. 그들이 제 동생을 돌구멍 속에 매몰차게 밀어 넣으니 당금애기는 깜깜한 어둠 속으로 속절없이 미끄러졌다. 동생을 밀친 오라비들이 손을 털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난데없는 천둥 번개가 치더니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흙비와 돌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홉 오라비는 두 다리가 땅에 붙어 꼼짝달싹 못한 채 흙비 돌비를 맞고 쓰러졌다.

 흙비 돌비가 몇 날 며칠 한정 없이 쏟아지자 발을 동동 구르던 어머니는 비가 개자마자 뒷산으로 뛰어올라갔다. 돌구멍 앞에 다다라 안을 들여다보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딸이 죽었구나 싶어 울음을 울려는데 돌구멍 속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여보니 아기 울음소리였다. 어머니는 칡넝쿨을 붙잡고 구멍 속으로 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울음 섞인 목소리의 당금애기 품안에는 아이가 하나, 둘, 셋이 안겨 어미 젖가슴을 헤치면서 칭얼대고 있었다.

 “이 여린 몸으로 어찌 혼자서 아이를 셋이나 낳았단 말이냐! 가자, 집으로 가자꾸나. 하늘이 너를 살렸는데 누가 너를 해칠까.”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온 당금애기는 후원 별당에서 세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처녀 몸으로 세 아이를 키우자니 그 답답함이야 오죽할까. 두 아이에게 젖을 주면 한 아이가 울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주위의 손가락질. 아이들이 쑥쑥 자라났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아비 모를 자식이라는 설운 이름이었다. 어느 날 참기 힘든 모욕을 당한 삼형제는 어머니 앞에 무너져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우리는 왜 아버지가 없습니까? 서러워 죽고 싶습니다.”

 당금애기가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울지 말거라. 다 말해주마.”

 당금애기는 가슴속 깊이 묻었던 일을 세 아들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기막혔던 하룻날 하룻밤의 일을. 말을 마친 당금애기는 품안에 고이고이 간직했던 박씨 세 알을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남기신 증표다.”

 박씨를 받은 삼형제는 곧바로 뒤뜰에 씨를 심었다. 씨는 하룻밤 사이에 싹이 돋더니 덩굴이 자라나 담 너머로 출렁출렁 뻗어가기 시작했다. 삼형제는 가마에 어머니를 태운 채 박 덩굴을 좇아서 길을 나섰다.


 가자, 어서가자. 아버지를 찾아가자.

 어디로 찾아갈꼬.

 지리산 태백산 묘향산 백두산 절마다 찾아가자.

 강남땅 서역땅 어디든지 찾아가자.

 아버지 계신 데면 어디라도 나는 좋네.


 셀 수 없이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삼형제가 다다른 곳은 머나먼 서쪽 나라의 낯선 땅이었다. 박 덩굴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산으로 접어들더니 골짜기 속으로 깊이깊이 스며갔다. 덩굴이 멈춘 곳은 조그만 암자 앞. 안에서 불경을 외는 소리가 들리는데, 당금애기가 들어보니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내가 왔습니다. 동쪽나라 당금애기가 아이들 데리고 당신을 보러 왔습니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한 스님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낯설다. 검고 얽고 땟물이 흐르기는커녕 이목구비가 그린 것 같고 살결이 백옥 같아 티 한 점 없다. 놀란 당금애기가 눈을 감았다 떠서 다시 보니 얼굴은 다르되 눈빛은 그대로다.

 그때 삼형제가 시준님한테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맞지요?”

 그러자 시준님이 얼굴빛을 엄하게 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내 자식이라면 뒷동산에 올라가 죽은 지 삼 년 된 소뼈를 살려내어 거꾸로 타고 와라.”

 삼형제가 소뼈를 주워 모아 정성껏 쓰다듬으니 살이 불쑥불쑥 돋아났다. 소는 움메, 울음소리도 힘차게 삼형제를 태워 왔다.

 “짚으로 닭을 만들어 살아 움직이게 해라.”

 삼형제가 바로 짚으로 닭을 만들어 숨을 불어 넣으니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목청도 우렁차게 ‘꼬끼오’ 울음을 울었다.

 “이래도 우리가 아버지 자식이 아닙니까?”

 “아직 부족하다. 손가락의 피를 내어 이 그릇에 담아봐라.”

 삼형제가 피를 내어 그릇에 흘리니 시준님도 피를 내어 그릇에 흘렸다. 그러자 네 사람의 피가 안개처럼 구름처럼 몽실몽실 싸여서 똘똘 뭉쳐졌다.

 “그래, 너희들은 내 자식이 분명하다.”

 삼형제는 세상에 난 뒤 처음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서 말했다.

 “아버지, 우리는 그동안 이름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이름을 지어주세요.”

 “그렇거든 큰아이 이름부터 지어보자. 푸른 띠 하였으니 청산이라고 하자꾸나.”

 그러자 당금애기가 나서서 말했다.

 “청산은 삼사월이나 청산이지 구시월에도 청산이리까. 몹쓸 이름입니다. 맏이로 태어났으니 맏형 자에 부처 불 형불(兄佛)이라 합시다.”

 “그건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둘째 아이는 누른 띠를 하였으니 황산이 어떠리까?”

 “황산은 구시월에나 황산이지 동지섣달에도 황산이리까. 그 이름도 못쓰겠습니다. 둘째 아이니 두 재 자 써서 재불(再佛)이라 합시다.”

 “막내의 이름 백산(白山)은 어떠합니까?”

 “동지섣달이나 백산이지 오뉴월에도 백산이 있으리까. 그 아이는 셋째 아이니 삼불(三佛)이라 지읍시다.”

 “그 이름 좋습니다. 형불, 재불, 삼불. 세 부처가 꼭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쌍둥이 삼형제는 삼불제석 제석신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고 복을 나누어주는 것이 제석신의 일이다. 그 어머니 당금애기는 어떤 신이 되었는가. 삼신이 되었다. 집집마다 아이를 점지하여 순산하도록 도와주고 병 없이 자라게 돌보아주는 신, 삼신할머니 말이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