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대구 경북 수필세미나 발제
새로움과 감동이 넘치는 수필을 위하여
1.
'散文의 시대'다. 수필가로서 팔을 안으로 굽혀 强辯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무한 우주관이 힘을 얻으면서 산문의 시대는 이미 예견되었다. 거대한 역사의 바퀴가 원심력을 가지고 단방향으로 질주하면서 산문의 시대를 열어 놓은 것이다.
작금의 수필은 이 기름진 토양 위에서 종횡으로 팽창을 거듭하면서 그야말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문학 속에서 수필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선배 수필가들의 盡力에 힘입어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해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음은 여전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집요하게 수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일까? 다수의 비수필인들은 이 시간에도 케케묵은 '문학성'의 논리로 수필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수필의 대응은 답답할 정도로 미약하고 궁색한 것처럼 보인다. 혹시 수필이 애초에 문학의 변경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태생적 속성을 지닌 것은 아닐까. 아니면, 수필이 정체성의 조정을 앞두고 기존의 틀을 고수하려는 강박 관념에서 진퇴양난을 맞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2.
수필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3분법과 4분법을 원용해봄직하다.
수필을 3분법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문학성의 시비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이의 적용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3분법이 '작가의 상상적인 재창조'만 문학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에 허구성이 도입되어야만 수용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만약 수필계가 리얼리티의 구속력에서 벗어나 "상상적인 재창조"를 허용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수필문학은 형식적인 다양성에 걸맞게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운 창작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또한 대중적인 흥미를 곁들일 수 있어 읽히는 수필로서의 접근이 용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나눔에는 공유성 만큼이나 차별성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수필은 시와 소설, 희곡으로 대표되는 3분법의 어느 자리에도 쉽게 놓여질 수 없으며 거기에다 이들과의 차별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수필은 4분법에 따라 지금의 교술갈래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다. 수필이 기법상 허구성의 유혹이 있어도 본질은 어디까지나 비허구성(non-fiction)에 있음은 확실하다. 교술갈래를 외적 개입이 있는 자아의 세계로 설명하고 있는데는 체험 즉 리얼리티에 그만큼 초점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이 체험이라는 것을 앞에 두고 보면 참으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수필의 제재가 되는 체험 즉 일상이라는 것이 별반 새롭지 않게 다중에게 다가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인생이 유별난 것 같아도 조금만 넓게 보면 그게 그것이다. 체험을 고집할수록 제재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고 장르는 노쇠화로 기울어지기 쉽다. 물론 수필이 존재의 본질이나 현상의 깊이를 다루는데 강한 면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반박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또한 감상성과 관념성, 보수성에 빠질 우려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수필이 세련을 앞세워 좁고 깊게만 들어간다면 결국 철학이나 종교와 같은 비문학적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결국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오늘날의 수필이 서정수필의 문학적 형상화에 더욱 천착하고 있음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교술갈래라는 울타리에는 수필 뿐만 아니라 일기문, 기행문, 서간문, 수상록, 자서전, 전기문, 칼럼 등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갖가지 비문학적 산문들이 포진하고 있어 수필의 비문학성 논의에 빌미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논의가 진행될수록 허구성이 마치 미래 수필을 추동하는 핵심인양 부각되어 버렸다. 그러나 결코 그럴 의도는 없다. 다만, 문학이 언어 예술인 이상 머리에서, 눈에서, 입에서, 손에서 떨어져 나온 체험이 허구를 전혀 배제한 채 문학적인 형상화를 이룰 수 없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구나 모든 문화의 장르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해체와 짝짓기를 거듭하는 퓨전시대에 수필만이 그것도 울타리 내에서 체험과 허구성으로 나뉘어져 서로를 대적할 이유는 없을 것이 아닌가.
3.
어쨌든 본 세미나에서는 '새로움과 감동이 넘치는 수필'을 부제로 붙였듯이 위에서 언급한 관점을 기저로 깔고 서로 異見을 가진 발표들이 진행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와 무관하게 이제까지 수필의 본령을 지켜온 서정 수필의 문학적 형상화에 초점을 맞춘 심도 있는 발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수필이 가진 본질 안에서 각종 수필 작법도 소개될 것이다. 이를테면 수필가들의 큰 호응을 받고 있는 5매 수필, 퓨전수필, 기행 수필이 그 예이다. 이와 함께 연작수필, 중편수필도 염두에 둘 만하다.
한편으로는 이와 달리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각에서 수필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른다면 더욱 자유롭고 새로운 제재와 시점·화자의 수필 세계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세미나를 흔히 패션쇼와 빗대어 보는 것은 取捨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본 세미나에서 새로운 논의가 있다면 유의해서 지켜볼 일이고, 낯익은 논의들이 있다면 쟁점화하여 바인딩(binding)하는 계기로 삼을 일이다. 발표 이후에도 더욱 가멸찬 논의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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