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정체성 찾기
1.
수필가 허창옥과 필자와의 만남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삼 년 남짓 되었을까. 그 동안 드문드문 교류가 있었고 그의 필명이 제법 친근해질 무렵 두 권의 작품집을 받았다. 한 권은 작품집 『길』이요, 또 한 권은 연전에 상재한 작품집『말로 다 할 수 있다면』이다.
"허창옥은 수필을 잘 쓴다." 이것이 두 권의 작품집을 내리 읽고 난 후의 느낌이다. 이 직설적인 표현 뒤에 덧보태어지는 말들은 아마도 구질구질한 사족이 될 것이다. 필자의 이런 태도를 두고 요즘 말로 코드가 맞아서 탄성을 내뱉는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겠느냐는 지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필집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에서도 한번 잡은 눈길을 도무지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작가는 사실 드물다.
2.
허창옥의 수필은 수필답다. '수필답다'라는 말은 수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타 수필가들은 수필의 본령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다만 허창옥의 수필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내용의 한 특성을 붙들고 수필의 정체성에 다가가 보고 싶다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수필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는 수필의 형식을 잘못 이해하는데 큰 원인이 있다. 문학의 각 장르들이 스스로의 형식을 표방함에 있어서 시는 율격을, 소설은 플롯을, 희곡은 삼일치를 강조하는데 비해 수필이 '무형식의 형식'을 들고 나오는데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다양성이라는 미명 아래 일기문, 기행문, 서간문, 수상록, 자서전, 비평문, 사설, 서문 등 무수한 산문들을 용인 내지 묵인하는 바람에 그로 인해 야기된 장르 개념의 퇴색은 수필계가 자초한 일이다. 결국 수필은 형식을 얼버무림으로써 서정 일변도의 내용만 강변하는 애매한 잡문으로 비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수필의 형식을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테면 수필이 소설의 형식적 요소를 공유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소설이 주제, 구성, 문체를 취하고 인물, 사건, 배경을 구성요소로 삼는다면 같은 산문문학으로서 수필도 당당히 그 형식적 요소들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소설은 자아와 세계와의 대결을, 수필은 자아를 세계화한다는 속성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수필이 갖는 다양한 형식은 그 영역 아래 잡다한 갈래를 포함한다는 의미로 쓰여질 것이 아니라 인접 장르인 시나 소설, 희곡의 형식까지 차용할 수 있다는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허창옥은 이미 여러 작품에서 이를 구체화하고 있는 바 연작 '바다에서' 1, 2, 3, 5, 6과 '동재가 자라서', '독백' 등에는 시적 표현 형식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그렇다면 시적 표현 형식을 빌려 오는 것이 수필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인가.
수필은 교술 갈래로서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다. 어떤 일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비평하고 알려주고, 깨우치는 기능은 자칫 비문학적인 속성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이에 반해 시적 표현 형식은 문학적인 정서를 환기시키는 기능이 강해 이를 차용함으로써 수필의 기울기에 균형을 잡고 비문학성을 상쇄하면서 문학성 제고에 유효함을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색, 관조를 바탕으로 내면의 조응에 충실한 허창옥으로서는 시적 표현 형식이 더욱 요긴하였을 것이다.
허창옥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은 그가 어떻게 수필이라는 구조물을 축조해 나가는가를 확연히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이 어째서 단아하고 튼실한 구조를 가졌다는 소리를 듣는가. 3000자 내외의 짧은 글에서 어떻게 40화음의 최신형 휴대폰 소리를 낼 수 있는가. 이는 '참을 수 없는.....'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품에 적용된 극적, 입체적 구성법이 그 답이다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 얼마 전, 집안 행사에서 만난 한 친척이 내게 한 말이다.
"그렇지, 정말 그런 것 같아."/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별일 없었어?"/ 나의 인사에 그가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중략)
그에게서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 그 하나는 십여 년 전에 마흔 살도 못 채우고 삶을 놓아 버린 오빠의 얼굴이다. (중략)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내 얼굴이다. 오빠 생각이 난 건 그러려니 하지만, 나는 왜? 그의 말 때문인 성싶다.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
그의 입으로 내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은 거의 전율에 가까웠다.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큼 살고 나서 마주보니 그의 얼굴이 내 얼굴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동류의식이다.(중략)
최근에 그가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전에 앓았던 늑막염이 재발하였고 간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의 남은 삶이 참으로 무거울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중략)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작품의 말미에 수필적 장치를 마련해 놓지 않았다면 사소설의 영역에서 결코 벗어나기 어려운 작품이다.
현대 수필의 초기단계에서 '백두산 근참기'라든가, '심춘순례', '서유견문'과 같은 기행문과 일기문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필자는 특별히 기행문이나 일기문에 배타적인 감정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으나 글의 전개방식에는 딴죽을 걸고 싶어진다. 기행이나 일기는 대체로 시간 순서나 공간 이동에 따라 제재들이 전개되는 자연적 구성을 취한다. 물론 개개의 글이 가지는 글의 성격을 배제한 채 전개 방식의 우열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나열이라고 그토록 지탄받는 작금의 수필이 굳이 이 무미건조한 자연적 구성에 애착을 가질 까닭이 어디 있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라는 서두의 문장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인과율 때문이다. 인과율이란 어떤 이야기를 빌미로 다음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전개 방식이다. 결국 이 서두의 문장은 작품 속에서 '오빠'를 지배하고, 이어서 '나',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 지배한다. 이처럼 여러 이야기를 하나의 지배 구조로 긴밀히 통합하는 구성이 극적 구성, 입체적 구성이다. 수필이 가지는 진실성과 논리성, 통일성, 구조의 형식미는 이러한 구성법에 의해 보다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허창옥은 이러한 구성법에다 수미상관의 장치까지 보태어 작품의 형식을 더욱 튼튼히 고정시키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그의 이러한 작업은 저간에서 말하는 실험성하고는 다른 차원이다. 수필의 형식적 다양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빈약했던 수필의 형식적인 정체성을 되찾아오는 작업임이 틀림없다.
3.
허창옥의 수필은 견고한 형식에 힘입어 매우 초점화된 사고행위를 반영하고 있다. 초점화된 사고 행위는 대단히 집약적이다. 마치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를 한껏 줄여서 대상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다. 장면(scene)의 변화가 거의 없기에 시선은 고정되거나 느린 이동을 이룬다. 당연히 횡적인 흔들림도 크지 않다. 끊임없이 종적으로, 내적으로, 구심력을 가지고 자의식을 깊이 파고드는 특징이 있다. 허창옥의 작품을 사색적, 관조적, 철학적 수필로 분류하는 것은 바로 이 초점화된 사고 행위와 관련이 있다. 그의 이러한 내면세계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지금 생각하니 나는 자의식 과잉의 꼬마였던 것 같다. 사랑 받지 못한다는 소외감과 감꽃 목걸이를 못 만들게 된 상실감 때문에 다른 것들을 거부해서 더 많은, 더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되었으니 말이다.
감꽃이 저버렸던 내 세계는 모든 것이 정체된 하나의 공간이었다. 이따금 지나가던 바람이 내 닫힌 세계의 문고리를 흔들곤 하였다. 그것은 호기심이나 외로운 감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자극이 들쑤실 때에는 나는 문고리를 애써 잡고 안으로만 움츠렸다. 그렇듯이 바깥바람에 섞이질 못하고 빗장 안에 고인 바람은 내 의식 속에서 아프게 휘감길 뿐이었다.
내 유년의 작은 손은 늘 비어 있었다.
-「다시 감꽃을 꿰며」에서
어쩌면 작가의 아픔일 수도 있는 유년의 편린을 가지고 그의 자의식을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작품 군데군데에서 연이어 배어 나오는 의식의 배경을 두고 추론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초점화된 사고 행위가 수필의 본령인 삶의 실체를 형상화하고 현상과 존재의 본질을 더욱 깊이 탐색하게 하는 묘약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허창옥의 수필이 초점화된 사고행위를 가지게 된 또 다른 요인은 그가 취하는 소재에 있다.
나는 늘 무엇인가가 그립다. 아득한 유년의 뜰이 그립고, 그 마당의 우물가에서 두레박질을 하던 젊은 어머니가 그립다. 이제는 멀어져 간 순진무구했던 날들이 그립고, 사라져 가는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립다.
나는 온갖 것들을 다 사랑한다. 물 무늬 잔잔한 못물과 그 못가에 서있는 나무를 사랑하고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바다를 사랑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이따금 몹시 아프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뇌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고야마는 슬픔 때문에 가슴 저미는 날이 적지 않다. 그런 정감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수필을 쓴다. 그러고 나면 내 영혼에 환하게 햇살이 든다.
-「햇살 가득한 방에서」에서
허창옥의 삶은 곧 수필이 되고 그의 수필은 곧 그의 삶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수필 쓰기란 그리움, 사랑, 슬픔 같은 일상의 앙금을 사색이라는 그물로 건져 올리는 작업이다.
하긴 수필가가 일상을 벗어나서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수필의 소재가 되는 개개의 일상들을 조금만 넓게 보면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어 누구에게나 낯익은 '별게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곧 바로 수필의 문학성과 잇닿아 있다. '쉽게 그리고 깊게, 그것이 수필의 딜레마이며 미학이요, 내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작가가 밝혔듯이 이 친숙한 일상은 문학성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깊어져야 한다'라는 명제와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해 친숙한 일상이 문학적 해석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쳐 어떤 농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문학성의 등급이 매겨진다고 할 수 있다. 그 농도를 짙게 하는 묘약이 바로 초점화된 사고 행위이다.
삶이란 인간 존재의 문제이고 존재의 문제를 세밀히 추적하는 것이 존재의 본질 추구이다. 존재의 본질 추구에는 사색이 필요하고 사색은 다시 관조를, 관조는 다시 철학을 요구한다. 허창옥의 수필이 사색적, 관조적, 철학적이라 함은 초점화된 사고 행위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지만 그 사고행위가 끊임없이 종적으로, 내적으로, 구심력을 가지고 깊이 들어가면 어디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여지로 남겨 두자. 필자는「바다에서 7」,「사(死」를 비롯하여 몇몇 작품에서 멜랑콜리(melancholy)의 무늬를 언뜻 감지했다.
결국, 허창옥이 사색과 관조라는 촉수로 필자를 감전시켜 단숨에 그의 내면세계로 끌어들인 힘 뒤에는 초점화된 사고행위가 또 다른 수필의 정체성으로 버티고 있었다.
4.
필자는 긴 사족을 덧붙이면서 허창옥의 작품 세계가 지니는 핵심적인 특질에서 비껴난 논의들만 하였음을 시인한다. 하지만 허창옥의 작품에서 풀어낸 형식과 내용의 한 끄나풀을 통해 그가 수필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는 작가임을 알았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들이 계속하여 수필의 정체성을 판독하는 중요한 준거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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