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사랑 주최
2003 대구 경북 수필작가 세미나
주제발표 1
수필문학의 현황과 과제
安在珍
저에게 주어진 논제는 수필문학의 현황과 과제입니다. 참으로 포괄적이고 방대한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의미 깊게 파악하려면 상당한 연구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천한 저로서는 감히 여러분의 기대나 요구에 충족할 길은 없고, 다만 평소 생각했던 몇 가지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논의하고자 합니다. 우선 한국의 수필 문단이 처한 외적 현상은 어느 자리에 서 있으며, 수필 문학이 지닌 내적 본질은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과제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제 사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외적 현황을 들자면 수필인구는 과연 얼마나 될것이며 그들의 역량은 또한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를 냉철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문협에 회원으로 등록된 수필가는 1530명이었습니다. 한국 문협 총 재적 회원이 6663명인데 시, 시조, 소설, 희곡, 수필, 아동문학, 평론, 번역, 등 8개 장르를 감안할 때 수필 인구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것입니다. 아니, 시인이 3천 40여명을 감안할 때 시 장르 다음으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한국문협 등록 회원만으로 정확한 문학인의 통계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문협등록 자체가 강제성이 없는 만큼 이와는 상관없이 다른 단체나 동호인회를 통해 작품활동을 하는 문학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수필전문지만 하더라도 한국수필, 에세이 문학, 현대 수필 수필문학, 창작 수필, 수필과 비평 등 수많은 수필 전문지가 월간, 격월간 계간으로 출간되고 또한 지방화 시대를 맞아 각 지역마다 종합문예지나 수필전문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현상입니다만, 이들 문예지가 추천 혹은 공모형식으로 배출하고 있는 숫자를 감안할 때 한국문협에 등록된 인원의 두배, 다섯배에 이르리라고 생각됩니다. 일단 수필 작가의 양적 확산에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성공적이라 일컫는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어떤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이상 많은 사람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학의 토양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언어를 생활의 수단으로 유지하고 있는 만큼 누구에게나 문학의 정서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문한인과 지방생, 그리고 독자가 구분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문학의 구성원 일수 있습니다.
즉 문학이 지향하는 이상은 인간을 완전한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자유, 더욱 광범위한 행복, 더욱 안정된 평화, 더 두터운 여유,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내적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학문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라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문과학은 어찌 보면 인간의 어느 한 면을 연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과학은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를,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 종합하는 정도로 총체적이고 파상적인 인간문제 접근에는 미흡하거나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학이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업적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지 문학자체로 사회개조의 직접적인 방법은 어느 곳에도 가용될 수 없으며 굶주린 자나 병든 자, 억압받거나 소외된 자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학을 하는 것은 인간을 단편적으로 파악하려는 다른 학문과는 달리 총체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끊임없는 고뇌와 사유 진정한 인간의 태도와 세계의 인식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본래적 자아를 인식시키고 진실과 아름다움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작업을 하므로서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얻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직접적이고 현상적으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으로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상작가가 가상세계를 그리므로서 문명을 북돋우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카타르시스처럼 인간의 비극을 세척하여 새로운 쾌감을 일깨우는 것이 문학일진데, 결국 문학은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형태로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핵이요 근원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때문에 문학에 근접하는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오늘의 수필 문단 현실을 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전기한 문예지를 통해 추천 혹은 공모 형식을 통해 배출되는 수필가를 보면서 과연 능력이 검증되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미진한 채로 등단되었다면 그 자체에서 파생되는 수필문학의 질적 저열은 물론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수필인들의 몫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전연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문제는 비단 수필문단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민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독자의 눈에 서툴게 각인되면 비록 등단의 절차를 밟았다 해도 작가나 작품은 소외 될 것이고, 한 때 주목받은 작가라 해도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작품을 발표하였다면 그는 또 다른 각도의 비판과 검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문단이란 조직이나, 소수의 의지에 국한된 등단 절차는 한국 사회만이 지닌 일종의 병폐일지도 모릅니다.
얼핏 생각하면 조직 속의 질서로 보일 수 있으나 좀더 크게 눈을 뜨면 질서 속의 무질서를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마치 정치 조직처럼 소수의 특권층을 구성하고, 그들 속에서만이 작가를 배출할 수 있다는 묵시적 권한 자체가 문학이 지향하는 자유와 이상에 배치된다는 견해입니다. 그렇다고 전연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작금의 실태로 볼 때 대부분의 수필문학 지망생들은 나이가 찬 분들입니다. 이는 문학을 향한 이론 습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창작에 투신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문학을 위해 가슴앓이를 한 사람이 많았다는 말처럼, 가슴 한 쪽에 털어 내지 못한 미련으로 남겨둔 채 세월에 쫓기고 생활에 부데끼다가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후 어느 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비로서 찾아낸 것이 문학에 대한 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불혹의 나이에, 혹은 지명 이순의 나이에도 등단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수필문단에 그런 문인이 많으냐 하는 문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수필이 문학이냐 아니냐하는 세간의 비상식적 논쟁과도 직간접으로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론 습득의 과정을 생략한 터에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 수필은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쓰면 된다는 오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여 늦게 출발한 문학지망생들이 수필 쪽으로 몰려들었고, 그런 분위기를 비하하여 문학성 시비를 몰고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이나, 같은 문학인이면서도 여백의 글이란 이름으로 수상집을 발간함으로서 수필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 탓인지 수필은 곱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도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의 책임 없는 말이 아니라 같은 문학인이 시비의 빌미를 제공할 때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홰 수필이 매도되어야 하는지.
지난 시절 한문으로 쓰여진 작품도 고전 문학으로 통찰하고 있으며, 닫힌 세상을 살아온 여인들의 애절한 사연을 적은 글도 가사문학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펜클럽도 분명히 에세이를 포함하여 명명한 것을 볼 때 분명히 세계적인 공의를 얻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수필과 에세이는 개념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동질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이를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필이 문학의 시비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런 안목을 가진 당사자를 의심할 일이지 결코 수필 자체를 응시할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말은 장르 차체가 시비나 우열의 대상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능력이나 창작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문학적 전문성을 지녀야 가능하다면 수필인 역시 전문성을 지녀야 좋은 작품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소설가나 시인이기 때문에 문학성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쓸 때만이 존중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필가이기 때문에 문학의 변방을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쓰지 않았기에 존중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성이 없이도 수필을 쓸 수 있다는 그릇된 수필관은 수필인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김광섭씨의 수필문학소고에 나타난 그릇된 문학관을 마치 잠언처럼 받아드린 대서 오늘날까지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지금도 그런 관점을 여과 없이 옹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문학이란 논지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의 단초는 수필이란 용어 자체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좀더 설명 드리면 수필이란 말은 용제수필에서 나타나는데, 문제의 대목은 의지소지 수즉기록 인기선후 무복전차 고목왈 수필(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先後 無復詮次 故目曰隨 筆)이라는 내용입니다. 풀어쓰면 생각이 떠오르면 선후에 기인하거나 차례에 구애되지 않고 엮었으므로 고로 제목을 수필이라 하였다. 즉 첫머리의 수즉 기록이란 말은 수시로 기록하였다는 의미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필이란 단어로 응축시킨 것이지 결코 붓가는 데로 따라 쓴다고는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어 사전에도 (어떤 양식에도 구애되지 않는 산문 문학의 한 부분, 인생과 자연에 대한 수상, 단상. 논고, 잡기 등이 포함되며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형식 없이 쓰인 글. 개성적, 관조적, 인간성이 내포되게 위트, 유우머, 예지, 기지, 로서도 표현됨. 만문, 산록 에세이로도 칭)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은 지금까지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수필관의 기반은 바로 수필인 들의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필이 허구를 배제 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소재는 신변잡사나 생활 언저리에서 채굴 할 것인데 그것들이 문학이냐 잡문이나 하는 것은 작가가 고뇌한 문학성 예술성 심미성이 얼마만큼 완성되었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열한 작가정신에서 묻어 온 문장의 완성, 예술적 형상화 대상이나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천착등 문학이 추구하는 제반 문제에 충실했을 때 바람직한 작품이 창출되고, 그런 작품이 수필문단의 주류를 이루었을 때만이 문학의 비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더구나 늦게 출발한 작가가 많으므로 기반이 허술하고, 기반이 허술한 만큼 더 많은 각고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김유정의 동백꽃이 시나 소설로서 장르적 특성을 잘 살렸다면 이양하의 나무나 피천득의 오월도 나무랄데 없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언 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늦게 출발한 작가라 해서 창작성을 의심받는 것이 아닐 진데 좀더 고뇌하고 사색하고 탐미한다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공이 가마에서 작품을 꺼낼 때 멀쩡해 보이는 것도 가차없이 부셔 버립니다. 자신이 의도한 예술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피와 땀을 쏟아 붓고도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 예술일진데 어찌 붓 가는 데로 쓰는 것이 예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결코 수필문학의 과제는 한마디로 좋은 글을 쓰는 것입니다. 창작 당사자의 목숨을 건 창작정신이 필요하고, 중견작가들은 새롭게 얼굴을 내민 신진작가들을 향해 제 얼굴에 침 뱉기 식으로 현실을 외면하거나 질타할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충고하고 독려하여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이나 예술분야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유도되는 처지입니다. 육필문학에서 인터넷 문학으로, 복잡하고 깊이 있는 쪽에서 가볍고 단순한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추세를 감안할 때 수필은 반드시 미래 문학으로서 당당한 입지가 마련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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