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의 말
김현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술을 아주 늦게 배웠다. 대학 3학년 때 문우들에게 끌려서 막걸리를 마시게 된 것이 그 시초였는데, 늦게 배운 도적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식으로, 이제는 제법 술꾼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술을 즐겨 마시다보니 내가 쓰는 수필에 술 얘기가 가끔씩 나오는데, 그것 때문에 이따금씩 진지한 얼굴의 문우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한다. 술 얘기 좀 제발 그만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술 얘기를 이따금씩 하게 되는 것은 술자리의 분위기를 지워버린 나의 삶을 생각하면 끔찍하기 때문이다. 술자리의 분위기란 이야기의 분위기이다. 돌아가신 양주동 선생께서는 화로 곁에서의 정담이 이야기로는 제일이라고 하셨으나, 나는 그런 운치는 아직 모르겠고, 내게는 역시 술자리의 이야기 분위기가 제일 마음에 든다. 마음에 맞는 친구하고, 막걸리든, 소주든, 맥주든 술을 앞에 놓고 마주앉으면, 내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리고 사실은 나 자신도 그것을 내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줄도 모르는 말들이 줄줄, 아니 술술 나올 준비를 한다. 술은 이야기를 정답게 하게 만들기 쉬운 문화적 장치이다. 술을 마시면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한 철학자는 호프만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호프만의 소설에서는 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 하고 있다. 호프만의 술 콤플렉스를 설명하면서 그 철학자는 어렸을 때 브륄로라는 술 만드는 광경을 아름답게 회상하고 있다. 어렸을 때 술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 회상의 심리적 값어치를 그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누릴 수는 없지만, 복지느러미를 넣은 정종에 불을 붙여본 이후에 나는 “불꽃이 조그마한 소리를 내어 알코올 표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충분히 즐길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불타는 술이 위 속으로 들어가면 말의 성감대를 움직여 사람의 입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술 마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것은 조그마한 소리를 내는 불꽃의 말이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혹은 홍차나 우유를 마시며 하는 말과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혀를 불태운다.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란 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 중에서도 사랑의 이야기가 가장 아름답다. 사랑이야말로 불 중의 불이기 때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는 여류 작가의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소설은 바로 그 불의 이야기이다. 한 부유한 공장 주인의 부인과 한 공장 직공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이루어져서는 안 될 사랑이 바로 술 때문에 피어오른다. 술은 두 사람 사이의 틈을 없애주는 아니 불태워주는 신비로운 매개체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술을 마시면서 점차로 현실의 옷을 입기 시작한다. 보통의 사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랑이다. 술이 깨면 그것은 없어지는 사랑인 것이다. 그 술의 사랑은 환상적 현실의 사랑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술의 사랑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처럼 비극적인 사랑이 아닌 평범한 사랑을 하는 경우에도, 술은 사랑의 강도를 높이고 서로를 미화시켜주는 신기한 마력을 갖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경우에도, 술을 앞에 놓고 기다리는 경우와 커피를 앞에 놓고 기다리는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커피를 앞에 놓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커피는 거의 아무런 위안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앞에 놓고 기다릴 때 술은 많이 위안을 준다. 술이 불태우는 말의 혀는 말들을 가슴속에 가득 모은다. 그 말들의 무게 때문에, 더구나 그 말들은 불타는 말들이기 때문에, 가슴은 뿌듯해지고 더워진다. 술은 말의 예비자이며, 말의 부피를 불리는 희한한 공기이다.
바로 그래서 말을 다루는 문학을, 한 철학자는 술의 도움을 받지 않는 문학과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으로 나누자는 대담한 제안을 하고 있다. 과연 현대 문학만을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보들레르 이후에는 그 구분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 혹은 술과 유사한 것을 통해 인공의 낙원을 만들려는 문학과 명료한 정신으로 세계를 분석하려는 문학의 대립은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그 문학의 어느 것만을 좋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현실을 분석하고 설명하고 비판하려는 의지와 함께 편히 쉬고 싶다는 욕망을 같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의 도움을 받지 않는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그 현실의 올바른 점을 강조하고 부조리한 점을 비판한다.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은 인공의 낙원을 제시하면서 그곳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것이 인간에게 특이한 한 경향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껴안는다.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에서 세계는 부풀어 올라 아름답게 불탄다.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라블레라는 소설가가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거인으로 내세운 가르강튀아라는 거인은 어머니의 왼쪽 귀에서 태어나자마자 “웽웽” 하고 우는 대신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자”라고 외친다. 그 거인의 술은 세계를 긍정하고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왕성하게 먹어보려는 욕망의 술이다. 그의 술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겠으나, 어려운 시대에 살았던 많은 문인들은 술을 통해서 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낙원을 바라다볼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이 더 좋은가, 도움을 받지 않는 문학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은 그러므로 우스운 질문이다. 그 질문은 차라리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 중에서는 어떤 것이 좋으며 어떤 것이 나쁜가, 도움을 받지 않는 문학 중에서는 어떤 것이 좋으며 어떤 것이 나쁜가라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하니까, 다시 술좌석의 분위기로 되돌아오게 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술자리는 과음이 되어 서로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큰 소리를 질러대는 자리나 공연히 처연한 몸짓으로 즐겁게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리이다. 과음이 되어 술자리가 높은 고함 소리로 가득 찰 때, 술이 부풀린 말들은 터져 불에 탄다. 그때 남은 것은 말의 뼈들만이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가 인용한, 과도하게 센 술을 마신 한 하층계급의 여인과 같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한 코펜하겐의 의사 일지에 의하면, “1962년에 먹는 것이라고는 단지 알코올을 과도하게 마시던 한 하층계급의 여인이 어느 날 아침 손가락과 뇌의 마지막 관절들만을 남긴 채 완전히 소진되어 발견되었다.” 그처럼 지나치게 뜨거워진 말들은 말의 뼈만을 남길 뿐이다. 그것은 보기에 추하다. 술자리엔 알맞게 고양된 목소리만이 있어야 한다. 과음은 술자리를 망쳐버린다. 그것은 싸움·넘어짐·상처 등의 과정을 거쳐, 술 마신 사람을 완전히 소진시킨다. 지나치게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부끄러움과 자신에 대한 증오로 얼마나 자신을 학대하게 되는 것이랴! 술자리는 즐거워야 하다. 그곳은 울분을 터뜨리는 자리나 슬픔을 과장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지나치게 슬픈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괴롭다. 그런 사람의 원형이 나에게는 「장 진주사」의 정철이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곳것거 산노코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혜 거적 더펴
주리혀 메혀가나
유소보장의
만인이 우러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 수페
가기 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물근 눈
쇼쇼리 바람불 제
뉘 한잔 먹자할꼬
하물며 무덤 우혜
잔나비 바람불 제
뉘우친들 엇디리
술이 인생의 무상함을 덮어주는 마취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술은 오히려 건조한 삶에 습기를 부여해주고, 엷은 삶에 두께를 부여해주는 고양제이어야 한다. 삶을 다시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우리는 삶을 부정하는 것일까?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이건 받지 않는 문학이건, 좋은 문학은 삶을 긍정시키기 위해 삶을 분석하고 부정하는 문학이다. 과음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쳐대기만 하는 문학도, 공연히 세계를 부인하는 문학도 다 같이 받아들일 만한 게 못 된다. 우리는 삶을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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