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작가*

인간, 그 미해결 존재를 사랑하며

아리솔솔 2016. 6. 14. 14:38



인간, 그 미해결 존재를 사랑하며

 

 

양귀자

 

 

   만약 우리들에게 20세기의 마지막 한 귀퉁이를 온전히 내던져 준다면, 그리하여 그 귀퉁이의 한쪽 모서리에다 불을 피우고 FM을 켜고 저녁 식탁을 차리게 한다면 아니, 그것보다도 그 귀퉁이의 어느 한 방을 비워 주고 거기에서 사랑과 철학과 인간을 위해 행동하라고 종용한다면……

   그래도 역시 세상은 아프고 고독하고 후회스러운 일들로 인해 지금처럼 회색일 것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실 세상은 항상 시대에 따라 율동하는 파도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제아무리 훌륭한 선장을 만나도 태풍이 오면 혹은 부서지고 혹은 죽는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훌륭하다라고 우리를 내세울 수는 없으니까.

   다만 우리는 해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할 뿐이다. 지금은 죽었지만 한때는 명성을 떨쳤던 대작가들도 늘 해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작가들은 해내도 없다라고 말한다. 멋있는 식사를 해봐도, 좋은 옷을 입어 봐도, 성능 좋은 전기제품을 가져 봐도, 다이아몬드로 열 손가락을 채워 봐도, 그럴 수 없이 잘난 남자와 혹은 여자와 결혼해 봐도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절망한다. 그리고 회의한다.

   ‘해내야 한다라고 말했던 동서고금의 고전들이 결국에 가서 신()속에다 인간을 귀속시켰던 것에 비해 최근의 문학 속에는 신을 질타하고 인간이 신을 능가하지 못함을 푸념하는 불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들 - 물론 양귀자나, 나 자신을 포함한 - 은 해내도 별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이끌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21세기의 한 귀퉁이에다 불을 피우려고 불씨를 품에 안은 채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은 다들 어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 권세, 사랑, 존경 등은 곧 우리에게 물려질 것이고 우리는 옛날을 잊은 개구리처럼 다시 지위에는 금력을, 권세에는 교만을, 사랑에는 편협을, 존경에는 격식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면 혹시 그때까지도 아직 잠들지 않고 있는 작가들은 도금되어진 금력, 교만, 편협, 격식 등을 벗겨 내려고 안달을 할 것이며, 작가들은 안달을 바라보면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져 있는 20세기의 한 모퉁이에다 불을 피울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름하여 권태라 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권태라는 것은 기실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전시물이라는 것을. 그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펼쳐지고 있어서 하나의 통일된 끈을 찾는 일이 힘들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은 권태가 필요악이라고 선전하고들 있지만 당신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시대에 살고 똑같은 분량의 자유와 꼭 그만큼의 굴레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저울질할 수 있기 때문에.

   때문에 나는 그만큼 불리한 포커페이스를 쥐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아무리 속임수를 쓰려 해도 당신들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넘겨 짚고 전세를 역전시킬 것이다.

   우리들은 그만큼 영악하다.

   너무나 영악한 당신들 속에 나도 끼어 있기 때문에 나는 쉽사리 가위도, 바위도, 보도 낼 수 없다. 내가 내민 가위가 당신들의 주먹에 여지없이 참패할 때, 어쩔 수 없이 나는 멋있는 홈드레스나 입고 컬러판 요리책을 뒤적이며 최후의 무기로 조미료부터 챙겨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가위를 내밀 수 없게 문드러진 나의 손이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참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귀 기울여 보라. 모든 악을 덮을 수 있는 우리들의 찬란한 시대를 이끌고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작가들이 회색의 도시를 표현하면서 해내도 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불 피우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권태라는 전시물을 남용하는 기성도 없을 것이다.

   또 있다. 그 시대의 모든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권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참된 회복을 당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이 좌절하고 번민하고 고통당할 것이다. 그래 봤자 결국은 그 많은 인간적인 것의 백분지 천분지 일도 못 그려내고 말 것이지만, 영원히 오리무중인 인간, 그 미해결의 존재21세기에까지 넘겨주어 백 년, 이백 년 이후의 작가들로 하여금 긴 장탄식과 함께 자신의 무능을 절감케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때가 온 뒤에, 당신과 나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 나오면서 우연히 맞부딪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