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전에서 만난 부부
양귀자
결혼을 하기 전에 남의 집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그저 무심하게만 보였었다. 그러나 막상 주부라는 명찰을 달고 보니 유난히도 그릇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잘 구워낸 때깔 좋은 항아리들을 보노라면 내 장독대를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는다. 아파트란 매양 다 같겠지만 볕바르고 네모반듯한 장독대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고 그저 꼭 필요해서 구입한 몇 개의 장독들이 있을 뿐이어서 항아리를 반들반들 닦아내고 열을 맞추어 맵시 있게 꾸며내는 재미를 잊고 살기 일쑤다.
그러나 지난 오월 고추장을 담그면서 나는 기왕의 항아리는 다른 용도로 쓰게 비워두고 입이 넓은 것으로 하나 장만할 생각에 옹기전을 찾게 되었다. 흙으로 구워내는 그릇이란 아무래도 봄에 굽는 게 제일 낫다는 생각도 있어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어지간히 큰 김장 항아리도 하나 사두고 싶었다.
시장 옆길로 들어가면 새로 터를 잡은 옹기전이 있다 해서 들러보니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옹기전 둘레에 말뚝을 세우고 새끼줄을 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못내 반가워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 그 부부는 나로서도 익히 알 만한 얼굴이어서 우리는 잠깐 지난 안부를 묻기도 했다.
지난겨울 내내 아파트 입구에서 리어카에 연탄 화덕 하나을 놓고 쥐포와 오징어, 땅콩 등을 팔던 그 부부는 이 봄에 새로이 보니 전혀 딴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누더기나 다름없던 나일론 점퍼를 걸치고 쥐포를 구워내던 때와는 사뭇 다르게 여자의 눈두덩 위엔 분명 푸른 색깔의 아이새도우까지 칠해져 있었고 남자 또한 구부정한 어깨가 활짝 펴져 다른 사람처럼 보일 만큼 씩씩한 모습이었다.
“자, 이 소리를 한번 들어보세요.”
이윽고 몇 개의 항아리들을 세심히 살펴보고 난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를 내보인 항아리는 과히 번드레하지도 않은 아주 소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여자는 걸레로 먼지를 닦아내고 그릇 밑바닥의 거친 돌기들을 숫돌로 정성스럽게 갈아주었다. 그 두 사람의 손은 리어카 행상의 과거를 지닌 자들답게 말할 수 없이 거칠었지만 그래서라도 더욱 투박한 옹기들과 잘 어울렸다.
결국 나는 김장 담글 항아리까지 하나 마련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그때 그만 여자가 실수를 저질렀다. 항아리를 하나 꺼내려다 옆에 놓여 있는 것의 손잡이를 깨뜨려버린 것이다. 그것은 김치 스무 포기쯤은 넉넉히 담을 수 있는 꽤 큰 항아리였는데도 남자는 여자를 나무라지 않았고 여자 또한 싱긋 웃을 뿐 이내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여자가 말했다.
“이래뵈도 우리는 집은 없지만 장독대 하나는 근사하답니다. 비록 손잡이가 깨졌거나 살풋 금이 갔거나 흠집이 있는 항아리들이긴 하지만 어떤 부잣집 못지않게 잘 차려 놓았다구요.”
깨지기 쉽고 흠집 나기 쉬운 옹기전 주인에 익숙해지자면 우선 자기 집 장독대가 풍성해야 할 게 아니냐는 그녀의 말은 정말 그럴싸했다. 연탄 화덕 하나를 의지 삼아 그 많은 삭풍을 견딘 어떤 부부의 새 삶. 그리고 그 부부가 이룩해 놓은 사글세방의 장독대. 문득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상상속의 그 흠투성이 장독대가 아름다웠다.
오월 햇살이 소담스럽게 미끄러지는 항아리들 사이를 누비며 열심히 그릇들을 매만지는 사이좋은 두 부부를 보면서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내 딸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두르면 안 돼. 조급해서도 안 돼.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또박또박 걸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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