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자국으로 꽃핀 얼굴
양귀자
길을 꽉 메운 차량과 온통 음지뿐인 아스팔트의 가운데쯤에 서 있으면 문득 고향이란 말이 떠오르곤 한다. 아쉽게도 나의 고향은 도청이 자리 잡은 어정쩡한 모습의 도시여서 달밤에 만나는 서낭당도 없었고 여름 땡볕 아래 펼쳐지는 강변의 벌거숭이 놀음도 몰랐기에 아예 추억해 볼 건덕지라곤 없었다. 그래서 풍성한 자연의 손길 안에 고루고루 닿이고 안긴 자들의 시들어진 고향이야기나 힐끗거리다 말곤 했는데, 요즘 들어 갑자기 눈앞에 환히 펼쳐지는 옛 모습이,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고향 도시의 정다운 옛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저편 아스라한 곳에 쟁인댁이 있었다.
지금은 퍼머넨트한 머리에 돋보기가 없으면 성경도 못 읽는 어머니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만 해도 반드레한 머리 모양새며 상큼하니 올라앉은 은비녀가 곱기만 했었다. 변한 것은 사람만이 아니어서 밤이면 휘황한 번화가로 둔갑한 집 주변에 어울리게 우리 친정집도 지금은 날렵한 이층집으로 변모되어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앞뒤로 하천이 흘렀고 기와집들이 좁은 골목길 따라 다닥다닥 이어 있는 한가로운 주택가였다. 다리를 건너면 신작로가 있었고 신작로 위로는 넓은 공터가 마냥 버려져 있어서 가끔 근처의 역에서 부려 놓은 석탄더미가 쌓여 있기도 했고 채석장이 한철 펼쳐지다 말곤 했었다. 그래도 공터의 귀퉁이를 잘라 원형의 화단이 잔디를 깔고 앉아 있어서 저편으로 보이는 역구내의 시커먼 풍경을 슬쩍 감춰주기도 했었다.
화단 옆에 서 있던 버드나무 두 그루야말로 항상 내 기억의 정점이 되곤 하는데 늘어진 가지들이 어찌도 그리 풍성하던지 그곳을 ‘버드나무 거리’라 불렀었다. 버드나무 그늘 아랜 봄부터 온갖 장사치들이 모여 들었고 그 가운데서도 쌀장수들은 아예 수년 이래 그곳을 터전삼아 소규모의 미곡상을 꾸며 놓곤 하였다. 쌀장수들 중에 쟁인댁이 있었다. 쌀장수야 사실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에겐 흥미가 없었다. 대신 그 옆에서 번데기장수, 엿장수, 냉차 장수, 설탕을 녹여 소다를 넣으면 잔뜩 부풀어 오르는 설탕과자 장수, 칡뿌리를 톱으로 썰어 팔던 칡 장수들이 있어서 잔돈 한 닢뿐인 우리들을 늘 망설이게 했었다. 그때 우리집엔 장정 하숙생이 셋에 오빠가 다서이나 되어서 뒤주에 쌀 한 가마 부어도 금방 바닥이 나곤 했었다. 그럴 적마다 어머니는 날 불렀었다.
“얘야, 쟁인댁 오래라.”
쟁인댁이란 아마 ‘장인댁’ 쯤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이름이었으나 ‘장인’이란 지역이 정말 그녀의 친정이름을 말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된 발음이 나는 ‘덕’자를 이용해 곧잘 ‘쟁이떡’이라고 부르곤 했다. 아마 그녀가 곰보쟁이란 뜻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런 이름은 으레 어린아이들의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 식구들은 모두 쟁인댁을 좋아했다.
사실로 말하자면 그녀는 대단한 추물이었다. 심한 마마자국 언저리에 끼어 있는 기미에다가 콧구멍도 슬쩍 올라붙어서 뜯어볼수록 흉하기만 했는데, 그 심성만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무던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베푸는 친절 탓인지는 몰라도 쟁인댁은 우리 일을 자기 일처럼 거들었다. 큰일이 있으면 물론이거니와 겨울철 김장에서부터 봄날의 홑청 빨래까지 도맡아 해치워 버렸다. 보통 날에는 히죽 웃으며 들어서선 어머니가 하고 있는 빨래며 청소를 돕고서는 몇 번씩이나 권하면 부엌마루에 앉아 김치가닥을 손으로 집어 밥 한 사발을 비우곤 돌아갔다. 점심때 수제비나 국수를 삶는 날이면 어머니는 으레 내게 쟁인댁을 불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왠지 그런 심부름만은 신이 나서 뛰어가 보면 쌀장수들은 자루에 기댄 채 졸고 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쟁인댁은 쌀가루를 헤집으며 뉘나 돌을 가려내고 있다간 내가 가면 흰쌀 한 주먹을 내주며 히죽 웃었다.
“쟁인댁, 엄마가 오래.”
“아가, 쌀 갖고 오라디야?”
“아니, 그냥 와보래.”
그러면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서 허둥대며 괜히 쌀자루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래 놓고는 정작 대문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냅다 마루에 걸레질부터 치고는 찬물에 걸레를 말짱 헹구어 놓고서야 걸터앉았다.
“멀라고 미안시럽게 내것까지 챙긴다요. 그냥 풀빵 두어 개 먹으면 요기가 되는디……”
먹고 나선 그대로 가는 법이 없었다. 설거지는 물론이요, 괜히 토방까지 싹싹 쓸어내고는 돌아갔다.
“어여 가봐, 손님 놓치겠네, 쟁인댁 부려 먹자고 점심 줬남. 저래 싸니까 밥이 남아도 부르기 머하당게.”
어머니가 일감을 빼앗으며 눈을 흘기면 또 히죽 웃으며 갔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그녀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고 했다. 결혼 첫 해에 소박을 맞고 친정에 돌아와 보니까 태기가 있어 얻은 아들이랬다. 갖은 풍상 다 겪어가며 고등학교까지 집어넣은 아들이 집을 나간 지 벌써 이태째라고 했다. 그래도 쟁인댁은 아들이 돌아오면 다시 학교 보내고 장가들인다고 첫새벽부터 쌀자루를 이고 버드나무 아래 나타났다. 어머니 말로는 그 아들이 동네에서 유명한 깡패라고 했다. 쟁인댁은 그때 자기 아들 또래인 우리 셋째 오빠를 보기만 하면 노상 두고 하는 말이 있었다.
“꼭 저 되련님만 해요. 키도 고만 허구 구녕새도 영락없어라우.”
그러고 보면 그녀가 유달리 자주 우리 집을 드나든 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짐작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시에서 하천 복개공사를 시작했고 버드나무도 베어 넘어져서 장수들은 뿔뿔히 헤어져 버렸다. 쟁인댁도 그 뒤 슬금슬금 안 보이더니 얼마 후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엔 다른 곳에서 장사를 계속한다는 소문이었다. 일 년쯤 후엔 쟁인댁이 아들 옥바라지에 정성을 쏟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때쯤엔 나는 이미 곰보 쟁인댁의 들창코며 히죽 웃는 웃음을 잊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 때였을까. 어느 오월, 어버이날이었다. 아침에 달아 놓고 간 어머니 가슴의 카네이션이 하교해서 돌아와 보니 두 개가 되어 있었다.
“시상에, 쟁인댁이 왔어야. 아들하고 왔지 뭐냐. 거참 잘난 아들이더라. 가슴에 빨간 꽃도 따악 달고 웃어 쌌더라. 아들이 나헌테도 하나 달아주며 어찌나 제 에미 위해 줬다고 치사를 하는지.”
잊고 있었던 쟁인댁 얼굴이 그 말을 듣고서야 일시에 떠올랐다. 그녀의 마마자국 그득한 얼굴이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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