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작가*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아리솔솔 2015. 6. 30. 17:21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겐지

 

 

1월ꁚ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가 되지 마라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손수 가꾼 정원이란, 특별히 사계절 내내 꽃이 가득 찬 공간이 아니다. 하늘에 들어찬 별처럼 찬란한 만개의 순간을 일 년에 며칠 정도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소우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즉, 불특정 다수의 눈을 의식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어디까지 감동시킬 수 있을까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극히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창조 공간이다. 이를 위한 고군분투요 고심참담(故心慘憺)이지만, 정원 가꾸기도 인생과 비슷해 몇 년간 경험을 쌓아 왔다고 해서 좀처럼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역시 또 실패란 말인가라고 참담해 할 만한 결과를 맞는 일은 거의 없다. 적어도 기대했던 효과의 절반 정도는 거둘 수 있게 됐다.

 

사적인 소우주

 

대지 350평인 우리 집은 해발 750미터에 위치해 있다. 아즈미노의 북쪽 외곽, 대략적으로 북알프스 기슭, 주위에는 무논과 비닐하우스와 농가뿐인, 자극이라고는 극단적일 정도로 없는 그런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가슴 설레는 절경은 오월 하순에서 유월 중순에 볼 수 있다.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비교적 늦다. 이 때문에 뭔가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일 년 내내 이 땅을 떠나지도 않고 여행을 가는 일도 없이, 마치 정원의 노예처럼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남의 땅의 절기 변화나 개화 상황 등을 알 길은 없다. 정원에 만개의 순간이 반짝 찾아올 때마다 ‘이 세상 봄의 중심은 역시 이곳이 틀림없어.’라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 혼자 흐뭇해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찰나에 불과한 만개의 순간을 위해, 다른 계절 대부분의 하루하루를 평범하기 그지없는 편집증적 분투를 하면서 보낸다. 그 덕분에 정원의 식물들이 불꽃놀이 장치에서 솟아오르는 불꽃 혹은 시한폭탄처럼 일제히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겨루는 색채와 향기의 제전이 계속되면, 술에 취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분에 푹 빠져 버린다. 붕 뜨고, 두근두근 안절부절 못한다.

그 무렵의 나를 본 사람들은 지금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거죠 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감상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원을 만든 존재인 나로서는 그들이 상상하는 정도의 대만족 경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정신을 완전히 잃을 만큼 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들오들 떨며 결과의 전모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세운 계획과 그것을 위해 아까운 기색 없이 쏟아 부었던 노동력이 잘 맞물려 작동하고 있는지 등을 생각하며 좌불안석하는 나를 부정할 수가 없다.

성취감과 절망감, 실패와 성공, 예상 이상의 효과와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 그것들이 교대로 들락날락하며 나를 갖고 논다. 그러는 동안, 고양과 긴장의 계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그 정도로 눈을 매혹했던 개화가 환영처럼 사라진 이후에는 한동안 방심한 상태가 되어 이전처럼 도전적인 기분으로 정원에 나갈 수 없게 돼 버린다. 꽃 같은 건 이제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연일 계속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지낸다.

 

으르렁거리는 투쟁의 시간

 

그 틈을 타 초목은 계속되는 비와 장마 이후 쏟아지는 햇빛을 최대한 활용해 무서울 정도로 성장해 간다. 억세고 끈질김에 있어서는 동물을 능가할 정도다. 잎의 수를 배의 배로 늘리고, 가지를 늘릴 수 있을 만큼 늘리며, 쉬지 않고 뿌리도 뻗어 나간다. 공존이나 협조의 정신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있는 것은 적자생존이란 가혹한 경쟁뿐이다. 으르렁거리는 소리 하나 없는 침묵의 투쟁이 낮이고 밤이고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한 달 전의 정연한 공간은 흉포한 밀림으로 바뀌어 있다. 정원을 정원답게 만들어 주던 질서는 위기를 맞는다. 이제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생활공간이 녹색 바다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릴지 모른다. 불안과 공포가 나의 투쟁심에 불을 붙인다.

풀 뽑기, 가지치기, 거름주기, 살균제와 살충제 뿌리기, 물 주기…. 시간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다. 때로는 하루 두세 시간의 집필조차도 그만두고 싶을 만큼 바쁜 날들이 계속된다. 이런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소설가가 맞는지 의심에 사로잡힌다. 오프로드 바이크를 거칠게 몰던 나를 보았을 때처럼, 마치 두 명의 내가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이상할 만큼 몰입해 그럭저럭 여름의 무더위와 건조함을 견뎌 내고, 어떻게든 무사히 가을을 맞는다. 잡초의 기세도 쇠하고, 정원도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는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이번에는 계획을 재검토하는 쪽으로 관심이 향한다. 정말 이런 배치로 괜찮은 걸까, 이 나무나 이 장미는 과연 이 정원에 필요한 것인가, 전체 정원 모습은 바람직한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런 냉철한 의문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좌불안석이 되어, 머리에는 질문과 그 해결책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안들을 두루 생각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중대한 결함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아, 이 나무가 방해를 하고 있구나.’ 중얼거릴 때는 이미 그 나무를 없애 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둘 중 하나를 서둘러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없애 버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 딱 감고 베어 내는 것, 또 하나는 지인의 정원으로 나무를 이사시키는 것이다. 베어 내는 것은 뿌리를 다치지 않게 파내는 것이 어려워, 옮겨심기가 거의 불가능한 경우로 한정된다. 베어 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주변 식물에 피해를 줄 정도로 크지 않을 경우엔 손으로 켜는 톱이라든지, 사슬톱, 도끼 등으로 순식간에 자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정원에 옮겨심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나무를 받아 줄 상대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장미나 철쭉, 병꽃 나무나 납매 같은 작은 나무라면 그다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큰 수목, 예를 들어 좀벚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같은 것들은 받아 줄 곳을 찾기 힘들다. 받아 주겠다는 이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옮길 수단이 문제다. 작업에 꽤 공을 들이고 긴 시간 노력을 기울여야 해서 자칫하다가는 나무가 말라 죽을 수도 있다.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는 금물

 

어찌됐든,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들을 정원에 모아 심어 놓고 물과 비료만 주면 저절로 정원 모양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정원과 자연의 결정적인 차이는, 간단히 말하면 질서와 무질서의 차이다. 물론 산이나 숲, 초원에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나긴 자연도태가 이룬 업적이다. 한 인간의 일생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는 질서가 아니다. 수백 수천 년, 때로는 수만 년의 아득한 세월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끊임없는 손질이 필요하고 인위적으로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 질서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도니다. 그 일을 게을리 하면 좁고 한정된 공간은 울창해지고 있군, 드디어 정원사의 관록이 보이는군 하며 감탄하는 사이에 점점 좁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곳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압박감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정원 본래의 역할이랄 수 있는 치유나 평온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 버리는 것이다. 몇 년 후에는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히거나, 빛이 부족해지거나, 병충해의 제물이 되면서 말라 죽는 나무가 급속히 는다. 그러다 보면 마치 죽은 자의 정원처럼 되어 버리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물건을 살 수 있는 데까지 사 모아 애지중지하며 놓아둔 것 같은, 잔뜩 어질러진 방과 흡사하다.

대개는 여성에게 그런 경향이 있다. 아까워, 추억이 담겨 있잖아 등등의 이유로 계속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문득 깨달았을 때는 자신조차도 누더기가 되어 있다. 폐인 같은 몰골로, 거친 무덤 같은 땅에 멍하니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유부단해 대담하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원 가꾸기가 어울리지 않는다. 가드닝 같은 것이 한때 크게 유행했다가 이제는 완전히 시들해져 버린 것은, 손에 들어온 꽃들을 품은 채 하나도 놓지 않으려는 성격의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염한 색채의 아름다움에 현혹돼 그것만 추구하면, 당연한 결과로 창작 의욕은 금세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모든 예술에 다 적용되는 법칙이다. 외형의 아름다움에는 빠져들기 쉬운 탓에 일시적으로 많은 팬이 모이고, 그 수가 많아지면 장사도 성공하며, 때에 따라 붐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경박한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 붕괴는 곧 눈에 보이게 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진화와 심화의 길을 더듬으면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끝없이 추구하고 착실히 노력하는 시간을 겹겹이 쌓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아름다움은 무한하고 끝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얻는데 발을 들여 정도(正道)를 걷는 참맛을 알게 된 사람은 두 번 다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정원이 만개한 그 순간을 끝이라 말할 수 없다. 적어도 나의 생명과 건강이 위태로워질 때까지 정원 가꾸기가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원 돌보기는 내가 살아 있는 증거라고, 그렇게 가슴을 펴고 단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