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발자취*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아리솔솔 2009. 8. 28. 20:16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金興雨-

                      


1. 남사당이란?

  남사당(男寺堂)은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을 말한다. 심우성(沈雨晟)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떠돌이 예인집단은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중매구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첫손에 꼽힌다.”라고 말하고, 남사당패의 연원이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다.

 “1900년초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 또는 자연 발전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 집단임에는 틀림없다. 이 같은 집단은 권력 주변에 기생하였던 지배층이 주관한 관노관원놀이(官奴官員戲)와는 달리 그 유지가 어려웠다. 유랑하는 민중놀이집단이 먼 옛날에도 있었음을 말하는 기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해동역사」에서는 이미 신라에 인형놀이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고려사」 폐행전(嬖幸伝) 전영보전(全英甫伝)과 「문헌통고」 「지봉유설」 「허백당 시집」 등에서도 역시 괴뢰목우희(傀儡木偶戲)나 그것을 놀았을 광대(廣大;연희자)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그럼 남사당패는 어찌 구성되어 있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잡이)를 정점으로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가지 놀이로 형성되어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 놀이판을 벌였다.

 ‘꼭두쇠’란 명실공히 패거리의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

 이두현(李杜鉉)에 의하면 남사당패 단원 수급과정을 “남사당패는 50명 내외의 많은 단원을 필요로 하여 그 충원방법으로, 첫째,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승낙을 얻어 받아들이는 방법과, 둘째, 가출아동을 대상으로 삼아 데려오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유괴하는 방법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꼭두쇠는 한 패에 한 명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 사람일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심우성은 ‘허가(許可)라는 뜻인데,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사전 승낙을 받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그 하나는 패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먹는 문제를 맡는, 즉 남사당패의 은어로 ‘밥’이라는 뜻 ‘글’의 임무를 맡았다. ”뜬쇠란 꼭두쇠의 밑으로, 각 연희분야의 선임자이다. 뜬쇠들은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 놀이에 예는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보통 기능자)’을 두게 되고, 가열 밑에 초임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꼭두쇠들의 판별에 의하여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놀이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한 가지씩의 재주를 익혀 가열이 되는 것으로, 이들이 가열이 되기까지에는 여장(旅裝)을 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던 점이 특이하다. 또 이들이 수동모(男)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예의도 있었지만 수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삐리는 거의 전원이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남사당패거리 사이에는 이 삐리의 쟁탈전이 치열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가지기 위한 방편도 되겠지만, 그보다도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사당은 서민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으로부터는 심한 멸시와 수모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두레가 있는 시기에는 그 마을의 두레기가 들판에서 나부낄 때, 그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 같은 데서 그들의 당기(용당기라고도 함)와 영기(令旗)를 흔들며 흥겹게 풍물을 돌리고 동니(舞童)를 받는 등 온갖 재주를 보여 준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지주의 사전 양해를 얻어 패거리를 끌어들일 의사가 결정되면 두레기를 흔들어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두레가 없을 때는 역시 마을에서 가장 잘 보일 언덕에서 온갖 재주를 보여 주면서, 한편으로는 곰뱅이쇠 혼자 마을로 들어가 그 마을의 최고 권력자를 찾아 자기들의 놀이를 보아줄 것을 간청하게 된다. 만약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가 나면 의기양양하게 길 군악을 우리며 마을로 들어서는 것이다.

 남사당놀이는 어두워진 다음, 놀이판으로 잡은 넓은 마당에 횃불을 밝힌다. 한편으로 풍물잡이들이 길 군악을 울리며 마을의 크고 작은 골목을 돌면 동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행렬을 이루면서 길놀이판이 된다. 이때에 놀이판에는 사전에 줄이 매어지고, 덜미의 포장과 버나․ 살판․ 덧뵈기 등을 연희할 마당 한가운데 큰 멍석 5~6장이 말린다.

 

2. 안성 남사당패와 그 놀이 과정 -金興雨

  ① 안성 남사당패의 형성

 그동안 남사당패의 은거지로는 경기도 안성을 비롯하여 진위와 충청남도 당진. 회덕, 전라남도 강진. 구례, 경상남도 진양. 남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송화. 은율 등지인데, 심우성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하여서 삐리들이 기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남사당이 전국적으로 언제 퍼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원조는 역시 안성이었다.”고 전제한 안익승(安益承)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였다고 한다. 1860년대 서운면 청룡리에는 남사당집이 여덟 채가 있었다 하여 ‘팔사당 마을’이라 불렀고, 바우덕이(박우덕, 또는 金嚴德)이라는 이가 남사당의 꼭두쇠로서 재질이 총명하고 소고와 춤에도 뛰어나 그에 대한 속요까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 뒤 안성 남사당패는 안성 복만이패→원육덕패→이원보패로 이어지는데,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을 서며 쇠가락을 전수받은 김기복(金基福)은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에서 상쇠로 전통 웃다리의 쇠가락을 쳐 왔다.

 앞에서 이미 밝혔지만, 안성 남사당패는 우두머리 꼭두쇠가 있고, 기획 담당자격인 곰뱅이쇠가 있으며, 각 연희 종목의 연희자 가운데 선임자격인 뜬쇠가 있다. 그리고 각 뜬쇠 밑에는 기능자들이 가열, 초보자인 삐리, 기능을 잃은 노인들인 저승패, 등짐꾼인 나귀쇠 등 40~50명을 구성되며, 풍물놀이를 하는 뜬쇠만 하여도 꽹과리. 징. 장구. 북. 날라리. 버꾸 등이 있다.

 이들은 다시 상무동님, 회덕님(선소리꾼 중 우두머리)을 비롯, 대접돌리기 중 우두머리인 버나쇠, 요술쟁이 중 우두머리인 얼른쇠, 꼭두각시놀음 조종자 중 대잡이인 덜미쇠, 당재주꾼 중 우두머리인 살판쇠, 줄꾼 중 우두머리인 어름산이 등으로 나누어져 한 패거리가 된다.

② 남사당패의 놀이 과정

 남사당패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공연을 하게 되는데, 앞에서도 보았듯이 아무데서나 놀 수는 없고, 곰뱅이쇠가 마을에 미리 들어가서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일단 허락을 받으면 터를 빌려 주는 곳에서 ‘마당씻이굿’을 벌인다. 구경꾼들이 모여들면 판으로 끌어들인 다음 한바탕 크게 놀기 시작한다.

 첫째는 ‘마당풍물놀이’이다. 이는 주로 농악놀이가 중심이 된 것이며, 둘째는 ‘버나놀이’이다. 대접을 돌리는 놀이인데, 이는 양반을 희롱하는 재담과 소리가 곁들여진 점이 특색이다. 셋째는 ‘살판놀이’로 앞곤두. 뒷곤두 등 여려운 재주놀이를 벌이며, 넷째는 ‘어름놀이’라 불리는 놀이로 줄타기 놀이로 재담과 소리를 곁들인다. 다섯째는 ‘덧뵈기놀이’로 이는 탈놀음을 이야기하는데, 마당씻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승잡이의 네 편으로 되어 겨루는 놀이이다. 그리고 여섯째는 끝마당으로 ‘덜미놀이’이다. ‘꼭두각시놀음’으로 박첨지마당. 평안감사마당 등 일곱 거리로 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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