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발자취*

들림의 시 2

아리솔솔 2009. 8. 19. 10:16

이와 아울러 이들이 엮어가는 현실은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사실적 현실과는약간은 층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신령'이라고 하는 다른 방식으로 실재하는 환상적 현실과 인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현실의 구축이 새로이 설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연희 마당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개인적이고 심미적이며 다층적인 현실세계가 새로이 열리는 것이다.

나는 여성시인도 바리데기 연희자와 같은 어떤 상징적인 치름, 그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여성시인에겐 스스로 인지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자신의 여성적 삶의 현실, 혹은

자신 스스로 구축하지 않으면 여전히 남의 현실로만 존재하는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여성시인은 그 순간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

그 병과 함께하는 죽음을 명명해야 한다는 것을 홀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아픈 몸으로 죽음과 삶의 소용돌이를 치러낸다.

그런 어느 시간의 점, 여성시인은 '여성성에 들린다.' 여성성에 들리는 경험이 없었다면 여성시인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여성시인이라고 명명한 참 여성시인이 아닐 것이다.

'들림'의 순간 여성시인은 자신의 이제까지의 경험들을, 상징적인 치름의 순간들을 명명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의 기록이 여성시인의 시편들이 된다.

이 시편들은 마치 바리데기 연희자가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에 들리어 자신과 단골들의 삶과 죽음의 공간을 뒤섞어 하나의 연희공간으로 닦아놓고 그 속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뭉개버리는 것처럼, 여성시인의 삶의 지평을 죽음으로 여는, 그리하여 죽음 속에서 삶을 건져올리는 한 편씩의 과정의 기록이 된다.

그러므로 여성시인들의 시편 하나하나는 그 시인의 '들린 여성성'의 하나씩의 환유적 연희공간, 하나씩의 바리데기 연희마당이다.

'들린' 여성시인들의 시는 표층적이 아닌 심층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텍스트는 표층적으로 실재한다고 믿어지는 현실 속에서 자기 스스로 '들림'의 경험을 표출하는, 구축된 현실을 표방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텍스트 내부에서 표층적인 서사의 단위들을 걷어내고 심층적인 공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바리데기 텍스트를 버림받은 아이의 탐색담이나 효행 신화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버림받는 상황 묘사를 통해 부모로부터 유리된 개체적 삶, 타자로서의 자신의 삶의 위상을 인식하는 순간을 읽어낼 수 있다.

혹은 부모가 득병하고 약수를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처방을 받는, 그래서 급기야는 버려진 아이인 자신에게 그 명령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표출하는 대목은 여성적 한을 표출하고 그 원한을 풀 수

있는 기제를 여성 스스로 간직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자각과 희생의 복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서역으로 고행을 떠나고 부모를 살리는 행위의 묘사들에는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숙명적 들림, 그리고 그 들림의 고통과 자신의 영혼의 숭고함을 표출하는 것으로 독해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김혜순

 

2006. 8.26-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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