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발자취*

들림의 시 3

아리솔솔 2009. 8. 19. 10:17

여성시 또한 여성의 실존 상황에 대한 반역, 그 파탄된 현실 상황에 대한 반역 속에서 여성성에 들린 영혼을 표출하는 이미지에 대한 심층적 독해가 반드시 요구된다.

그래서 여성성에 들린 여성시인들의 시는 이계(異界)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환상공간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의 죽음, 상징을 체험하는가를 밝혀내는 것으로 그 의미를 읽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여성시인이 여성성에 들리는 것은 아마도 내면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일 것 같다.

심미적 감수성이 촉발되기 시작하는 청춘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때 여성은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내면의 목소리의 실존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여성시인은 내면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두려움과 함께 기쁨이 엄습해옴을 느낀다.

그리고 점점 더 자신이 삶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음도 알게 된다.

이제까지의 시적 대상들이 다른 징조를 품고 달려들기 시작한다.

연희자에게 달려드는 죽은 혼령처럼 모든 외부가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여성시인의 외부에 존재하던 상징적 존재의 함의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앞서간 여성들의 삶의 모습들이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여성적 삶의 존재 기반이 여기와는 다른, 저 먼 곳에 있음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자, 이름 붙일 수 없는 병(病)이 찾아온다.

세상으로부터의 격리의 아픔이 물밀듯 밀려온다.

어떤 울부짖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음을 느낀다.

자신의 내부에 실재하는 것을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신과 싸우는 또하나의 자신을 느낀다.

그것이 더 깊은 아픔을 몰고 온다.

이 싸움을 온전히 묘사할 수 없는 자신의 혀에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실재하는 내면의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자신의 현실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죽음을 명명하게 된다.

출산의 고통과 같은 강도로 죽음이 고통스럽게 잉태됨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죽음에 들린 여성의 세계가 자신의 어딘가에서 활짝 열림을 느낀다.

여성성에 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 체험은 일회적인 선을 따라 끝나는 경험이 아니라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반복된다.

그런 반복 속에서 여성시인은 그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그 죽음 같은 것, 상상적인 표상, 내 속에 실재하고 있는 모든 어머니들 중의 한 어머니- 그러나 이제는 나의 이 한 몸 안에 응축되어 있는, 이제는 죽음으로서만 살아 계시는 그 어머니의 영험의 환유에 들리지 않고는 살 수 없음도 알게 된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위 실재한다는 미메시스의 세계 속에서 여성시인은 점점 위축되지만 그러나 죽음이 개입한 영역, 그 들림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점점 더 대화적이고, 연희적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징적인 치름의 무수한 반복, 외부와 내면의 들락거림, 이 나선형의 궤적 속에서 여성시인은 어느 순간 자신이 이 현실로부터 부과받은 정체성을 버린, 변형된 어떤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느끼게 된다.

죽음과의 관계 속에서만 명명될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규정되는 정체성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 마치 바리데기 연희자가 자신을 찾아온, 자신이 마주한 죽은 혼령를 명명하듯이, 여성시인 또한 자신을 찾아온 그 '들림'의 실체를 각 시편들 속에서 환유적으로 명명하게 된다.

이 명명을 통해 여성시인을 찾아온 죽음은 '죽음으로서의 삶'을 얻게 되고, 죽음과 삶의 거리는 뭉개져 버린다.

이때 현실세계는 표층적으로 포착되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여성시인이 심층적으로 내면화한 현실세계, '참으로 존재하는' 현실세계가 된다.

이 현실세계 속에서 각 여성시인은 자신들의 타자, 바리데기 식으로 말하면 자신들의 단골들과 은유적 확장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죽음과 삶의 소용돌이와의 진정한 교류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들은 춤과 노래의 관능적이고 격렬한 리듬의 도가니에서 혼연일체가 된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김혜순

 

2006. 8. 26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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