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참여의 즐거움

아리솔솔 2010. 1. 28. 16:08

참여의 즐거움 

 

 

사람에게는 말을 하고 듣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본능이 있음이 분명하다. 수업 시간이 좀 지루해진다 싶으면 남자 선생님들은 툭하면 "내 군대 있을 때 말씀 야···"로 말을 꺼내기를 좋아한다. 또 여자 선생님들은 지난 밤에 TV 연속극 이야기를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꺼낸다. 학생들도 이미 다 들었거나 보았던 이야기이지만 또 들어도 재미있다. 새로 부임하시는 선생님들께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허구헌날 졸라대지 않았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사람이야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은밀한 기쁨 때문에 대숲에 대고 그 소리를 질렀다고나 하지만, 비밀도 아니고 남 다 아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헤대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말 엮는 본능이 짐작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입이 무거워서 말을 참는 사람이 더러 있다. 남들이 군대 얘기며 첫사랑 얘기로, 또 남들 다 보는 드라마 얘기로 꽃을 피울 때 묵묵히 듣기만 하면서 미소나 짓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인간의 말하는 즐거움 추구가 모두에게 보편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이다. 그토록 입이 무겁던 사람이 일단 한 번 발동만 걸려 봐라. "내 말 알아들어?"를 거듭 거듭 되풀이하면서 한 말을 또 하고 다시 또하고 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들 것이다.
 더군다나 아빠들의 경우 약주라도 한 잔 하셨다면 이야기는 끝이 없다. 평소에는 그토록 억제했던 것이라도 술에 취해서 사람들의 입이 가벼워져서 "숲에 든 꿩은 개가 내몰고, 오장 속에 든 말은 술이 내몬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니까, 역시 성격의 차이가 있을 뿐, 말을 하는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기에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이야기를 세 시간, 네 시간도 넘게 할 수 있는 힘이 여기서 솟아나기도 한다.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본능과, 하되 즐기면서 하기 위한 재미를 추구하는 결과다.
 따지고 보면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 주고픈 본능이 그 즐거움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염상섭(廉想涉)의 저 유명한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첫머리만 보더라도 그런 성격은 분명해진다.

 내가 중학교 2년 시대에 박물 실험실에서 수염 텁석부리 선생이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차례차례로 끌어내서 자는 아기 누이듯이 주정병에 채운 후 옹위하고 서서 있는 생도들을 돌아보며 대발견이나 한 듯이,
 " 자, 여러분. 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시오."
 하고 뾰족한 바늘 끝으로 여기저기를 콕콕 찌르는 대로 오장을 빼앗긴 개구리는 진저리를 치며 사지에 못박힌 채 벌덕벌떡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8년이나 된 그 인상이 요사이 새삼스럽게 생각이 나서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애를 써도 아니 되었다. 새파란 메스, 닭의 똥만한 오물오물하는 심장과 폐, 바늘끝, 조그만 전율···. 차례차례로 생각날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쭈뼛하고 전신에 냉수를 끼얹는 것 같았다.
 남향한 유리창 밑에서 번쩍 쳐드는 '메스'의 강렬한 반사광이 안공을 찌르는 것 같아 컴컴한 방 속에 드러누웠어도 꼭 감은 눈썹 밑이 부시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머리맡에 놓인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둔 면도칼이 조심이 되어서 못 견디었다.
 
 개구리의 내장에서 더운 김이 나느냐 나지 않느냐로 시비가 붙기도 했던 대목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와 무관하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야기'를 즐기고 있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의 자기와 기억 속의 모습을 짝지어 가면서 이야기는 엮어진다. 개구리 해부 시간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것이 현재의 상황과 짝을 이룸으로써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틀이 갖춰진 셈이다.
 생물 시간에 일어난 이야기가 이렇듯 심각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학교의 중간 고사 생물 시험 문제이다. 괄호 넣기 문제였다고 한다.
 (문제)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곤충은 머리, 가슴, (  )로 나뉘어져 있다.

 답은 물론 '배'였다. 대부분의 학생이 '배'라고 정확히 썼다고 한다. 쭉 일사천리로 채점을 해 나가다가 한 학생이 써 낸 답을 보고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배꼽을 쥐고 웃었다. 답인즉슨,
 "곤충은 머리, 가슴(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학생은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하며 답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해 듣는 우리는 포복 절도하게 된다. 설마 이렇게 답을 쓴 학생이 있겠느냐고 묻지 말자.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토록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는 시험이라는 공포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음 문제도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역시 괄호 넣기 문제이다.
 
 (문제) 개미를 세 등분으로 나누면 (  ), (  ), (  ).

물론 머리, 가슴, 배가 정답이다. 근데 이 문제의 학생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심각하게 답을 한다.
 "개미는 세 등분으로 나누면 (죽), (는), (다)!!"
 시험장에서 겪은 이 학생의 심각함이 우리에게 웃음의 감동을 주는 것이나. 김동인이 어느 강가에서 들은 노래 소리를 듣고 써 내려간 "배따라기"가 주는 감동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 작품은 대동강 모란봉에서 들려 오는 노래 "배따라기"의 임자를 찾아 그의 노래에 얽힌 사연을 듣는 것으로 화두를 삼고 있다.
 
 그는 '배따라기'의 맨 마지막, 여기를 부른다.
 밥을 빌어서 죽을 쑬지라도
 제발 덕분에 뱃놈 노릇은 하지 말아
 애야 - 어그여 지여 -
그의 소리로써 방향을 찾으려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섰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드디어 그 노래의 임자를 만나고, 그의 한숨을 발견하고, 운명의 힘과 삭이지 못할 원한의 느낌을 전해 받은 다음 그의 사연을 청해 듣는데, "십구 년 전 팔월 열하룻날 일인데요···. "를 경계로 이야기는 서술자의 입으로 옮겨 간다.
 그렇다면 이 소설 '배따라기'는 무엇인가? '배따라기'야 서도 민요 가운데 하나로 '이선악(離船樂)이라고도 불리는 노래다. 그것을 부르고 들은 사람을 어찌 수로 헤아릴 수 있으랴? 서도 가락의 애잔함에 담긴 그 노래의 정서를 느낀 사람도 한둘일 것인가?
 그러나 김동인은 그 익숙한 '배따라기'의 틀에 들어서면서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배따라기의 사연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제 말놀이가 왜 즐거운지에 대한 해명도 끝이 난 셈이다. 그것이 문학의 길이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는 일도 끝낼 때가 되었다. 문학이란 것이 어느 특정한 작가들만의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물려받아 생활로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틀 속에 자기를 얽매여 두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릴 때 그 기쁨은 희열의 경지로 발전한다. 자잘한 말놀이로부터 수수께끼의 정신이 다 그러하며 그것이 바로 문학으로 향하는 길목임을 알아차렸으니, 문학쯤이야 무엇이 두려우랴. 오직 즐거움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문학이 다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나 그 기본 원리는 이야기를 엮어가는 재미에 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고, 그것은 군대 얘기며 첫사랑 얘기처럼 말하는 즐거움의 추구이며, 수다에 취하면 같은 말을 다시 또 다시 되풀이하는 본능의 발로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문학이 어찌 즐거운 놀이가 아닐 수 있겠는가.
 문학이 이처럼 즐거운 놀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우리 역시 이야기 더 나아가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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