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비판
어른들의 세계에 이런 일도 있다. 요즘은 그런지는 몰라도, 욕을 잘해서 손님을 끄는 술집이 더러 있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술은 무슨 술을 더 마셔? 술 많이 마셔서 잘된 사람 봤어? 그만저만 처먹고 얼른 가서 마누라 궁둥이나 만져 줘!" 이런 식이다. 욕을 이렇듯이 독하게 먹으면 기분이 나빠야 할 터이나 어찌 된 셈인지 손님은 점점 늘어만 간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왕왕 있었다.
왜 그런가? 사람에게 본시 학대받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서 그렇다는 설명도 한다.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우는 재미'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자. 눈물을 펑펑 쏟는 영화를 보려고 암표를 사면서까지 몰려든 놈습과 욕을 먹기 위해서 술집에 가는 것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을 법하지 아니한가. 그렇다, 우는 재미와 욕먹는 재미는 그 근원이 같다. 울고 나니 시원하다든가 욕을 먹고 나니 후련하다든가 하는 것은 나중 얘기고, 그것이 우리 삶에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는 한도에서 우성 재미가 있다.
그 재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인간은 신과 악마의 중간에 있는 존재라고도 하고 그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야누스같은 존재라고도 한다. 그 어느 쪽이 더 인간다운가 하는 것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중세까지의 지구 위에서는, 악마의 본능을 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악마의 짓이라고 생각했고, 그러기에 보통보다는 비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문학에서 해야 되는 것으로 알았다. 신과 비범한 사람은 다른 것이지만 인간은 그 비범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부 활극의 존 웨인이나 람보 같은 인물도 그런 비범성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고전적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그런 일은 쉽지가 않고 인간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오늘 우리의 삶은 비범해지기보다는 평범해지기를 요구한다. 영웅의 소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영화에서 그런 비범한 역할은 로보캅 같은 기계나 터미네이터 같은 인조인간이 맡게 된다. 이런 생각은 리얼리즘과 끈이 이어져 있다. 인간은 누구나 평범하고 또 삶은 고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인간의 참된 인간성은 그 자잘하고 괴로운 삶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다. 신들의 이야기가 신화요, 영웅들의 이야기가 고전의 세계라면, 인간의 이야기는 근대 문학의 세계다. 프라이(N. Frye)같은 학자는 문학사를 그것으로 구획지을 수 이TEk고 g마녀서 신화, 로망스, 아이러니 등의 명칭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문학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알면되고, 우리는 근대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곤궁하고 괴로운 모습을 그리는 데로 옮겨 온 시대라고 알면 족하다.
수녀원 이야기는 신과 악마의 사이에 있는 인간의 못브을 함축하기 때문에 우스갯 소리의 소재가 많이 되어 왔다. 그것은 특정 종교에 대한 가치 판단과도 무관하다. 이런 얘기는 어떤가? 수녀원에 갓 들어온 젊은 수녀 하나가 수녀원장을 찾아와 호소한다. 밤이 괴롭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지 않으려고 해도 남자 생각이 간절하니 원장님께서 이를 물리칠 길을 인도해 달라는 간청이다. 수녀원장은 피스톨(pistol)을 하나 준다. 밤에 남자 생각이 나거든 거울 앞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권총 실탄을 발사하라는 것이었다. 젊은 수녀는 그대로 했다. 권총 소리에 놀라면서 밤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 주일만에 권총 실탄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실탄을 얻으려고 원장의 방문을 열었더니만, 자 주목하시라, 수녀원장은 거울 앞에 서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지닌 재미의 요체는 성적인 은밀함과 관련된어 있다. 그러나 그 점을 논외로 하고 생각해 보면 리얼리즘의 맥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인간은 본시 약하고 괴로운 존재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것을 인간적이라고 한다. 욕쟁이 할머니에게서 욕을 듣고 후련하듯이, 인간의 연약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볼 때 인간은 인간적 친밀감과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기미를 이해하게 되면 나도향(羅稻香)의 '벙어리 삼룡이'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는 건넌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색시는 없었다. 다시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또 없고 새서방이 그의 팔에 매달리어 구원하기를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뿌리쳤다. 다시 세까래가 불이 시뻘겋게 타면서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부엌으로 가 보았다. 거기서 나오다가 문설주가 떨어지며 왼팔이 부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몰랐다. 광으로 가 보았다.
그는 다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야 그는 색시가 타 죽으려고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색시를 안았다. 그리고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나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로소 자기의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이 자기의 가슴에 느껴지는 것을 알았다. 색시를 자기 가슴에 안았을 때 그는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하였다. 그가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 알고, 그 색시를 내려놓았을 때는 그는 벌써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애써 읽는 심리가 리얼리즘을 낳는다. 그것은 우리가 공동 운명체라는 연민어린 자각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하찮은 오해가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몰아가는 일은 현실 속에 수없이 많다. 그것을 함께 깨달으면서 살자고 리얼리즘은 부르짖는다. 그러기에 리얼리즘이 현실 고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됨은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 아닌가.
현진건(玄鎭健)의 '운수 좋은 날'이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서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리면 족하다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남편은 아내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마로 까치집 같은 환자의 머리를 꺼둘어 흔들며,
"이 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보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차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천정만 보느냐, 응?"
하는 말 끝에 목이 메었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을 어릉어릉 적시었다. 문득 김 첨지는 미칠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부터가 벌써 이죽거리는 투가 역력하다. 그것은 실은 '운수가 몹시 나쁜 날'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삶이 지닌 양면성과도 관계가 있다. 기쁨이 슬픔도 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슬픔과 기쁨은 손등과 손바닥처럼 하나인 것이 우리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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