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끄적임
글을 끄적이지 않은 지 몇 주가 된 듯하다. 그 몇 주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은 한 것 같은데 그 일들이 마치 꿈처럼 아득하다. 엄마는 좀 내 말을 잘 들어라고 지적하는 두 딸의 말처럼 당장의 일도 곧장 잊어버리는 나고 보면 며칠 전이나 몇 주 전 일이 가물가물한 건 당연하다.
도대체 내 정신머리는 늘 어디에 가 있는 걸까. 한 권의 책에 빠지면 온통 그 책 속에 들어가 가상 인물들 뒤만 쫓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 말이 깊이 들어올 리 없다. 책 속에 빠지면 책 인물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 잡념까지도 책 내용으로 바뀐다.
나는 평소에 잡념이 많다. 그 잡념이란 시간의 태엽을 끊임없이 되돌리는 일이다. 몇 시간 전 것, 어제 것, 며칠 전 것, 몇 주 전 것, 몇 년 전 것,.... 상황 상황에 놓였던 나를 꺼내 태엽을 감았다 풀었다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하는데, 그 과정에서 걸러 나오는 것이란 대개가 부정적인 것들이다.
부정적인 것들을 추출하는 시간은 나를 지치게 하고 악하게 만든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이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혈액의 흐름처럼 태엽이 저절로 부정적인 쪽으로 감긴다. 벌써 나의 뇌구조가 그렇게 바뀌어버린 거다. 그런 시간 안에서 흙탕물이 돼가는 내가 싫어져 어쩌면 책을 줄기차게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살감기인지, 코로나인지 모를 증세로 연일 누워 있는 상황이다. 분명 코로나 걸릴 만한 곳엔 가지 않았는데 코로나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통에 집에서도 식구들과 격리 중이다. 코로나 환자(정확히는 오미크론 환자)가 몇 만 명 대로 급증하니 정부는 이제 개인에게 책임을 떠밀고 손을 놓아버리려고 하는 듯하다. 증세도 감기처럼 약하니 그럴 만도 하고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나도 생각한다. 무한적 통제로 이어가는 조치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기처럼 일반화해서 개인이 알아서 치료하는 게 맞는 듯하다.
코로나 같다는 핑계를 대며 이층 서재에 누워 읽어오던 책을 연일 붙잡고 있다. 예전에 대충 읽었던 박경리의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다. 전에 '토지'를 대강 읽었던 이유는 사투리 때문이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읽어내려니 꼭 외국어를 번역해 가며 읽는 것처럼 더뎠다. 사투리 때문에 인물들을 하나하나 파악하지 못했다.
사투리 속에는 그 지방의 모든 것들이 배어 있다. 그 지방의 물, 흙, 바람, 공기, 몸짓, 전통 등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에게만 배어 있는. 그 배임에서 저절로 탄생한 언어라고나 해야 할까. 그들 안에 있어본 적 없는 내게 '토지'는 그래서 어려웠다.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몸짓. 그 깊은 생래와 역사가 쉽게 다가올 리 없다.
타지인 대구에 내려와 산 지 27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향처럼 내 말속에 그네들의 말을 녹여낼 줄 몰랐다. 하긴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의도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대구에서 태어난 둘째에게도 사투리를 못 쓰게 했던 일을 떠올리면 말이다. 억세고 투박한 말을 여린 딸들 몸에 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지니까. 그래서인지 두 딸은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 때는 사투리를 쓰고 집에 오면 표준말을 자연스럽게 썼다. 마치 두 나라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일이다. 27년이 내 안에 알게모르게 스며들었던 걸까. 하 글쎄 '토지' 안에 든 사투리가 내 의식 속에서 술술 풀려 나오는 게 아닌가. 마치 주술에 의해 빙의된 것처럼. 글이 술술 읽히고 잡념까지도 경상도 사투리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래, 니는 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