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작가*

하늘에 다리를 놓는 연날리기/안도현

아리솔솔 2015. 4. 20. 17:28

 

 

하늘에 다리를 놓는 연날리기/안도현

 

 

 

 

나는 빳빳한 종이로 딱지 접는 법을 잊어버렸다. 동전과 비닐을 이용해 제기를 만드는 법도 잊어버렸다. 자치기 할 때 쓰는 나무의 길이와 굵기도 잊어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도망쳐 왔다. 나는 불행한 어른이 되었다. 나는 망했다. 그래서 나는 한없이 슬프다.

 

하지만 내 아들놈 앞에서 떵떵 큰소리를 칠 때가 딱 한 번 있다. 겨울이 오면 연 하나만큼은 내 손으로 멋들어지게 만들어 아들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방패연을 말이다. 까불까불 공주에서 까딱거리다가 뱅그르르 추락하고 마는 가오리 연 따위가 아니라, 유장하게 하늘을 헤집고 다니는 방패연! 그것을 만드는 일만큼은 나도 자신이 있다. 내 아들놈한테 물어봐라. 연을 만들 때는 나도 썩 괜찮은 아비가 된다.

 

소싯적에 외갓집을 가면 외할아버지는 해마다 방패연을 만들어 주셨다. 햇볕이 잘 드는 사랑방에서 나는 외할아버지가 연을 만드시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대나무를 갈라 가늘게 깎는 일, 창호지에다 떨어지지 않게 대를 붙이는 일, 그리고 꽁숫구멍을 뚫어 연줄을 매는 일까지 외할아버지는 심혈을 기울여 연을 만드셨다. 어린 외손자의 장난감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가히 전 생애를 쏟아 붓는 듯했다. 턱을 괴고 외할아버지의 손끝이 세심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볼 때, 시간은 유난히 더디게 흘러갔다. 그때마다 내 조급한 마음은 한 발 앞서 바람 부는 언덕으로 달려가곤 했다.

 

연을 날리는 데도 만만찮은 기술과 요령이 필요하다. 연을 바람하고 얼마나 잘 놀게 하는가에 따라 연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바람하고 다투거나 화해하지 못하면 연은 추락하기 십상이다. 더 높은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기 위해서 연은 바람하고 잘 사귀어야 한다. 바람이 연의 품을 그리워하면 껴안을 줄 알아야 하고, 바람이 난데없이 심술을 부리면 미련 없이 떠밀어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연이 잘 알아듣도록 연을 띄우기 전에 단단히 주의 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람이 도와줘서 연이 쉽게 공중으로 떠오른다고 생각하지 말자. 연은 연의 힘으로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지상에서 처음 발을 떼면서 연은 좌우로 몸을 흔든다. 그리고 발아래를 휘 둘러본다. 그도 왜 두렵지 않겠는가.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공중에서 그는 고독한 몽상가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패연, 그는 고독을 즐길 줄 안다. 도대체 외로워할 틈이 없는 지상의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고독해지기 위해 흔쾌히 지상을 떠난다.

 

나는 무엇보다 방패연이 하늘에 고요히 정지해 있는 상태를 사랑한다. 지상으로는 귀밑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도 하늘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 연을 보면 최대한의 존경을 보내고 싶어진다. 연은 남의 등허리를 밟고 올라서서 하늘로 떠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솟구쳐 오른 뒤에, 연은 겨울 하늘 한쪽에 턱하니 번듯한 창문 하나를 낸다. 그 창문을 통해 연은 하늘의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는 도저히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공중에 정지한 연의 눈이 무엇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지를.

 

다만 연줄을 잡고 있는 손을 통해 어떤 팽팽한 긴장이 하늘과 지상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연을 날리는 일은 하늘과 교신을 시도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하늘에다 다리를 놓고 싶은 꿈이 연을 만들어 띄우는 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로 올라가 보지 못한 우리는 연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연이 실현해 주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연자새’라고 부르는, 오래된 얼레가 우리 집에 하나 있다. 나무로 만들었는데 아주 잘생겼다. 이 얼레는 내가 열두어 살 때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올 겨울에도 나는 아들놈을 옆에 앉혀 놓고 싸묵싸묵 방패연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 얼레에다 연줄을 매어 주면서 하늘에다 다리를 한 번 놓아 보라고 말할 것이다. 얼레를 만들어 주신 그 할아버지의 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먼 훗날 어른이 되면 너도 누군가에게 또 방패연을 만들어 줄줄 알아야 한다고, 은근히 압력도 가하리라.

 

작년까지만 해도 아들놈은 혼자서 연을 띄우는 일이 영 서툴렀다. 하기는 하늘과 지상을 잇는 일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터이다. 아들아, 올해는 기대해 보겠다. 겨울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너도 하늘에 보란 듯이 창문 하나 매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