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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공선옥

아리솔솔 2015. 2. 2. 13:58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 - 공선옥

 

 

- 맛있는 사과를 혼자 먹으면 다순히 사과일 뿐이지만 지금 배고픈 자에게 나누어주면 사과가 사랑으로 변신할 수도 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좋은 것은 늘 그러잖아도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가더이다.

 

- 춘천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서서 따가운 가을햇살을 받고 있는 내 그림자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다. 그럴 때는 나보다 내 그림자가 더 쓸쓸하다.

 

- 토요일 오후 한나절을 공중전화통 붙잡고 서 있는 순정한 저 청춘들을. 귀대가 임박한 시간, 어묵국물 목에 넘기며 후루루 몸 떨고 서 있는 저 애잔한 스무 살들을. 푸른 군복 한 벌 지어 입혀놓고는 우리가 언제 잘해 준 적 한번 없는 어린 저들을.

 

-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그 무서운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만 하는가. 그럴 각오들이 되어 있는가.

 

- 김선일씨의 죽음은 바로 그의 조국이 처한 위태로운 현실이 빚은 비극일 것이다. 어쩌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는 동맹을 거부했을 때 올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겁쟁이거나,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동맹관계만 지속되면 자신의 삶이 크게 위태로워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극도의 이기주의자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겁쟁이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이 이기주의자로 살 만한 현실도 아닌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 삶에 진실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은 평온해진다. 내가 땀 차서 자꾸 발이 미끄러지던 그 여름의 신작로길과 눈바람 치던 그 겨울의 기억을 자양분 삼아 컸듯이 민우, 민욱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기억이라곤 아스팔트와 컴퓨터뿐인 아이들에 비해 그애들은 그 얼마나 풍요로운 기억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게 그애들을 위로한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자니까.

 

- 나는 지금도 길 하면 그 길부터 떠오른다. 양쪽에 키 큰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던 길, 어쩌다 버스 한 대가 산모롱이를 돌아오면 어느 쪽으로 먼지가 날리는지 보고 재빨리 왼쪽,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걸었던 길. 술 배달하는 술도가의 '말구루마'를 얻어타기도 했던 길. 먼데서는 남학생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 벨소리에 괜히 가슴 두근거렸던 길... 그 길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봄 되면 미루나무 둘레가 연두색이 되었다가 여름 되면 미루나무는 그 주변을 모두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가을이면 우리들 머리 위로 노란 미루 나무잎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고, 겨울이면 흰 눈꽃 핀 그 길을 따라 먼데서 누군가 나를 찾아올 것만 같아 마음 설레던 그 길.

 

- 내 직업에 충실하느라 세상을 망가지게 하거나 나 자신이 망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망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진짜 망가진다는 것의 의미는 돈을 못 벌게 되는 상황보다도 더 이상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치조차도 없는 삶을 이르는 것일 터이다.

 

- 가난하여 제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제가 가진 것이라곤 노동력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받아야 했던, 차마 다는 읊을 수 없는 상황들에 처한 더기씨 가족이나 내 아버지나,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하여 제 살던 곳을 떠나온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외국에서 이 땅으로 돈을 벌러 온 한 가족을 통해 다시 돌아보게 된 내 모습을 나는 차마 있는 그대로 쓸 수가 없었다.

 

- 몽골은 좋다, 공기도 좋고. 한국은 복잡하고 공기 나쁘다. 지금 사는 곳은 나무 한 그루 없다. 지하셋방이다. 그래도 한국이 낫다. 거기에는 더 나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었다. 몽굴의 아름다운 풍경, 청량한 공기, 순박한 인심을 생각하면 그립기는 하지만, 슬프다고. 말하자면, 아름다운 풍경이 가난한 그들에게는 상처인 셈이다. 예전에 우리 아버지도 그런 말을 했었다. 공기 좋고 인심 좋은 고향에서 살고 싶지만, 좋은 공기가, 좋은 인심이 우리 가족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고, 그리하여 아버지는 평생을 고향을 그리워하며 객지를 떠돌다 결국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 그 상투성, 혹은 구태의연함, 계몽성 글에서 푸이는 매너리즘 같은 것이 느껴져 스스로 무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목만 그렇다면 거론할 일도 아니다. 내용 또한 미흡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내가 진정 무안해하는 것은 내 사고의 편협함이다.

 

- 내 사고의 깊이의 일천함이다. 아니 어떻게 빈곤의 문제, 혹은 빈곤의 공고화, 계층화의 심화, 빈부의 양극화 문제를 논함에 있어, 기껏 대안이랍시고 제시할 수 있는 게 '나눔의 생활화'라는 지극히 동화적 발상 하나뿐이란 말인가. 나누는 것, 말인즉슨 아름다운 말이다. 누군들, 나누며 사는 삶을 아름답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 먹고 살기 어려운 이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하고 말할 때, 나는 거기서 도덕을 느낀다. 먹고 살기가 위중한 이들에게 먹고 살기 위한 몸짓은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다. 그러나 반대로 먹고 살 만한 이들이 똑같은 말을 할 때, 그 말에서 나는 음습한 부도덕의 기미가 느껴진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파업이며, 무슨 문화며, 무슨 역사며, 무슨...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먹고 살 만한 이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하는 순간 그들은 그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의 존엄을 상실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이전에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에 온몸을 맡기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자'들의 글조각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내가 그런 중첩된 절망적인 풍경 앞에서도 가녀린 희망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 차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요구하는 노동현실이 지금 이 땅 건설현자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현실에 있는 이들에게 책읽기로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요, 기만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통렬한 심정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 우리 아이들이 날마다 전쟁을 치르듯 학교며 학원을 다니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에 나가 좀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남보다 위에 서고 싶어서, 경재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사회나 국가가 일렬로 줄을 세워서 선착순으로 남을 이겨낸 사람을 선택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획일화의 대오에서 앞줄에 선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니, 국민들이 줄을 서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서로 앞줄에 서려고 전쟁 같은 일상을 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 누군가의 평생 헌신을 필요로 하는 병을 앓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럴 경우에 사랑이라는 말로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을 묶어두기에는 무언가 마뜩찮다. 또 다른 누군가가 '직무유기'를 학 있다는 느낌이 진하게 묻어난다.

 

* 사변적: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

 

- 돈이 많은 신혼부부보다 두 영혼이 참 잘 맞는다 싶은 부부들을 보면 나는 지금도 약간의 질투 어린 부러움을 느끼고는 한다.

 

* 인물: 김성칠 선생-역사 앞에서

           서준식- 나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