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작가*

수채화/헤르만 헤세

아리솔솔 2011. 11. 24. 15:40

 

 

  수채화/헤르만 헤세

 

  정오쯤 나는 오늘 저녁 그림을 그리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며칠째 바람이 불었으며 저녁에는 수정처럼 맑다가도 아침이 되면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그리고 이제 약간 잿빛을 띤 온화한 공기, 꿈꾸는 듯 부드러운 베일이 주변을 감쌌다. 아, 그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공기의 베일이었다. 저녁이 되어 태양이 비스듬히 기울면 세상은 놀랍도록 아름다워지리라. 물론 이런 날만 그림 그리기에 좋은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날씨에도 그림은 그릴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세상은 아름다웠고, 푄 바람이 불어오는 오전에는 세상이 놀랍도록 투명해져서 이곳에서 네 시간 정도 떨어진 마을의 유리창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좀 다르고 특별했다. 이런 날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아니라 ' 그릴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녹색뿐 아니라 붉은색이나 황갈색에도 풍부한 울림이 있었고, 포도밭의 낡은 말뚝 하나하나가 자신이 드리우는 그림자와 함께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아름답게 서 있었다. 그리고 짙은 그늘 속에서도 온갖 색채가 분명하고 힘 있게 자신을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방학이 되면 그런 날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림 그리기 대신 낚시가 내 주된 관심사였다. 낚시 역시 원한다면 언제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묘한 바람이 불고 묘한 냄새가 나고 묘한 습기가 느껴지고 구름과 그 그림자의 모습이 묘한 날이 있었다. 이미 그런 날 아침이면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날 오후 저 아래 다리 근처에서는 돌잉어가 헤엄칠 것이며 저녁이면 피륙 공장 근처 냇가에서 농어가 입질할 것임을. 그 후로 세상은 바뀌었고 내 삶 역시 그렇다. 소년 시절, 낚시질하는 날에 느꼈던 그 즐거움과 충만한 행복감은 어느새 전설 같은 일로, 더 이상 믿기 어려운 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인간 자체는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어떤 종류의 것이건 즐거움과 놀이를 만끽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낚시를 하는 대신 수채화를 그린다. 그리고 날씨의 조짐에서 그림 그리기에 적합한 멋진 하루를 예감하는 날이면, 늙어버린 내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 방학 때 느꼈던 즐거움의 여운이 다시금 살며시 나타나며 어떤 일이든 준비하고 감행하려는 욕구가 인다. 그런 날은 내게 좋은 날이며, 나는 여름마다 그런 날이 며칠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늦은 오후에 나는 집을 나섰다. 등에는 그림 도구를 담은 배낭을 지고 손에는 작은 접이 의자를 들고서 점심때 미리 생각해둔 장소로 갔다. 우리 마을 위쪽에 있는 가파른 산자락이었다. 전에는 울창한 밤나무 숲이었지만 지난겨울 나무들이 모두 베어졌다. 아직 향기가 남아 있는 그곳의 나무 둥치들 사이에서 나는 이미 여러 번 그림을 그렸다. 그곳에서는 우리 마을의 동쪽이 내려다보였다. 짙은 색 기와를 덮은 낡은 지붕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담홍색 지붕들도 서너 개 있었고 아직 겉을 발라 마무리 짓지 못한 담장의 한 귀퉁이도 보였다. 그 사이로 여기저기 나무와 정원이 있었고 하얗거나 색깔 있는 빨래 몇 점이 바람에 나부꼈다. 건너편으로는 거대하고 푸른 산들이 보였다. 앞뒤로 포개진 산들은 보랏빛 그늘을 드리운 채 장밋빛 봉우리를 이고 서 있었다. 그 오른쪽 아래에 호수가 있었고 호수 너머로는 밝게 빛나는 작은 마을 몇 군데가 보였다.

 

  내게는 두 시간가량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해가 서서히 기울면 지붕과 담장들 위로 내리쬐는 햇빛은 점점 더 따스하고 짙은 황금색으로 변할 것이다. 스케치를 하기 전에 나는 호수까지 이어지는 계곡의 다양한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멀리 마을들이 있었고 가까이는 잘린 단면이 하얗게 빛나는 나무 둥치들이 보였다. 나무 둥치들에는 벌써 1미터쯤 되는 싹들이 무성히 자라나 있었다. 그 사이의 불그스름한 마른 땅에는 어렴풋이 빛나는 암석들과 폭우에 깊게 패인 도랑들이 보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우리 마을을 바라보았다. 이 작고 따뜻한 둥지에 안겨 있는 담과 박공벽들, 지붕들의 모든 선과 평면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수십 번이나 찬찬히 살펴보고 연필로 그려본 형체들이었다. 예전에 짙은 밤색 벵갈라 도료로 칠해져 있던 커다란 지붕 하나는 이제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조반니의 집이었다. 그 지붕 아래 널찍한 다락 공간에는 가을이 되면 황금빛 옥수수들이 매달렸다. 그런데 그 커다란 지붕 전체를 이제 조반니가 새로 덮은 것이었다. 몇 달 전 조반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이제 상속을 받아 부자가 된 조반니는 부지런히 집을 수리하고 증축하고 칠을 새로 했다. 그리고 그 뒤편에 있는 키 작은 카바디니의 조그만 집도 적어도 한 면은 새로  칠을 했다. 그 키 작은 사내는 결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정원이 있는 쪽의 벽을 헐어 문을 만들었다. 그렇다. 마을에는 집을 소유하고 집을 짓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저녁이면 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일요일이면 술집에 가서 보치아 공놀이를 하고 마을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저 모든 집들과 오두막들은 누군가의 것이며 누군가 지은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거기 살면서 먹고 잠자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돈을 벌거나 빚을 진다. 그리고 저 모든 정원과 나무들, 풀밭, 포도밭, 월계수 그리고 한 뙈기의 밤나무 숲에도 임자가 있다. 그것들은 팔리고 상속되며 기쁨을 낳는가 하면 걱정거리가 되기도 한다. 새로 지은 커다란 학교에는 아이들이 가서 긴요한 것들을 배운다. 아이들은 여름에 석 달 동안 방학이 있으며 용감하고 굶주린 듯 삶을 향해 내달리고 집을 짓고 결혼하고 담장을 허물고 나무를 심고 빚을 지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이 사람들이 그들의 집과 정원에서 보고 있는 것, 그런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거나 거의 눈길을 끌지 않는다. 지하실에 물이 차고 창고에 쥐가 들끊고 굴뚝이 막히고 정원에 심은 코에 그늘이 너무 많이 진다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일에 기뻐하지도 근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 앉은 내가 우리 마을에서 보는 것, 그것을 이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저 아래 바래고 갈라진 석회 벽이 하늘의 파란색을 끌어당겨 땅 위까지 물결치게 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녹색 미모사 사이에서 박공벽의 빛바랜 분홍색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하게 미소 짓는지 보는 사람은 없으며, 아다미니 집의 어두운 황갈색이 짙푸른 산을 배경으로 얼마나 풍성한 느낌을 주는지, 그리고 신다코 네 정원의 측백나무 잎새들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는 사람도 없다. 바로 이런 순간에 색채들의 조화가 가장 순수하고 멋진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 이 작은 세계에서 나타나는 색조들의 조화와 명암의 단계와 그림자들의 싸움은 단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저 아래 푸르스름한 조개껍질 같은 골짜기에서 저녁의 황금빛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저편의 산들이 공간 뒤로 더 멀찍이 물러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집을 짓고 허물며 숲의 나무를 심고 베어내고 창문틀을 칠하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보는 사람, 이 모든 행위와 일들의 관찰자인 사람, 이 담장들과 지붕들을 눈과 가슴에 담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림으로 그리려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아주 훌륭한 화가는 아니다. 나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계절마다, 날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변하는 이 골짜기의 모습, 저 평지의 굴곡과 호숫가의 형태와 풀밭 사이의 구불구불한 길을 나만큼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그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밀짚모자를 쓰고 배낭을 메고 한 손에 작은 접이 의자를 든 화가가 있는 것이다. 그 화가는 어느 시절이건 포도밭과 숲 가장자리를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엿보며 그 때문에 간혹 어린 학생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이따금 그 화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집과 정원, 아내와 자식, 기쁨과 근심이 있는 것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나는 하얀 종이에 연필로 간단히 스케치를 했다. 그러고는 팔레트를 꺼내 그 위에 물을 부었다. 이제 나는 젖은 붓에 나폴리 황색 물감을 살짝 묻혀 내 그림 중 가장 밝은 점을 찍는다. 그것은 저 뒤의 풍성하고 기름진 무화과나무 위에서 빛을 반사하는 박공벽이다. 이제 나는 조반니나 마리오 카바디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내 근심에 신경쓰지 않듯 나도 그들의 근심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 대신 잔뜩 긴장하고 집중하여 녹색과 회색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애쓴다. 나는 멀리 있는 산 위에 물기를 살짝 바르고 녹색 잎들 사이에 붉은색을 찍으며 그 사이에 다시 파란색을 찍는다. 그리고 마리오의 붉은 지붕 아래 그림자를 그려 넣으려 애쓰고 그늘진 담장 위로 보이는 둥근 뽕나무의 금빙 감도는 초록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이 저녁 시간 동안, 내가 마을 위 산자락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이 찬란하고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관객이나 관찰자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으며 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뭔가 갈망하는 어린 아이처럼 의연히 내 행위에 몰두하고 내 놀이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192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