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수필문학입문13강

아리솔솔 2010. 1. 10. 22:41

 

일상의 참신한 해석을 위하여

 

홍 억 선

1.

매달 쏟아지는 수필집과 작품들을 보면서 바야흐로 수필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실감한다. 지난 세기에 서구의 무한 우주관이 온 세계를 뒤덮으면서 이미 수필의 시대는 예견되었다. 더구나 모든 장르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해체와 짝짓기를 거듭하는 퓨전 시대를 맞아 가장 폭넓은 장르로서의 수필문학이 미래문학을 추동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한 겹 가려진 막을 열고 내면을 들여다보면 수필 문단의 풍요로움이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향상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거나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문학성의 시비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상업주의와 적당히 결탁한 타 예술인들이 이러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약간의 정보와 흥미를 곁들인 애매한 잡문으로 수필 문단을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수필 마당에 이처럼 멍석이 번듯하게 깔렸는데도 왜 수필가들은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위세를 부리지 못하고 관객들의 눈밖에서 밀려나고 있는가? 식상할 대로 식상한 지적이겠지만 이 책임은 결국 수필가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몇몇 수필가들의 치열한 창작 정신에도 불구하고 형상화되지 않은 일상을 신물나도록 되새김질하는 안일한 매너리즘이 '수필 쓰고 있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불러들이지 않았는가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격랑이 휘몰아치는 세기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규모와 빠르기를 짐작할 수 없는 물살에 실려 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의 영역들이 생존을 위한 탐색전을 곳곳에서 벌이고 있다. 이는 지나간 시대에서 일어났던 일과성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세기에서 재편성될 장르 설정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필 문단의 현실은 미동도 않는 훼리호의 특등실에서 격랑의 바다를 외면한 채 자기들만의 축제를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평자는 안티 에세이(Anti-Essay)에 대한 논의를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그러나 반수필(反隨筆)로 해석되는 안티에세이란 용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겠다. 선배 수필가들의 업적을 조금이라도 폄훼하고자 함이 아니요, 기존 수필의 정통성을 배타적인 안목으로 접근하자는 뜻도 아니다. 단지 통시적 관점에서 어떤 조류(潮流)가 맹아(萌芽)하여 꽃을 피우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예비하듯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수필 문단에 발전적인 바람을 불어넣어 보자는 새수필 운동쯤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수필 형식의 이론 정립이 시급하다. 흔히 수필을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수필의 한 특성을 지정하는 말은 될 수 있어도 수필 형식의 정의는 될 수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예술의 갈래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었던가. 모든 예술은 형식과 내용이 상호간에 치열한 각축을 벌이면서 미적 가치를 담아왔다. 수필이 여느 장르와 달리 폭넓은 그릇이라는 장점을 내세워 삶의 총체적인 진실을 담아왔다고는 하지만 자유로운 형식이 오히려 내용 일변도의 잡다한 문학으로 몰아갔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수필 형식의 이론 정립을 위한 토론은 서둘러 전개되어야 하겠다.
  이와 함께 실험 수필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수필을 '붓가는 대로 쓰는 글'로 주저 없이 해석하면서 '시도하다'라는 실험성이 함축된 'Essay'의 어원을 굳이 도외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수필의 실험성은 다양하게 시도될 수 있으며, 이를테면 시로부터 운율을 차용할 수 있을 것이고 희곡으로부터 막과 장의 구성법을 인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허구성 문제도 전향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 수필이 언어를 표현 매체로 삼는 이상 언어의 분절성, 추상성으로 인한 허구적 표현은 불가피하다. 또한 일상을 문학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욕망 개입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젊은 수필가들의 출현은 수필 문학의 기름진 토양과 미래를 위하여 더욱 간절하다. 수필을 40대 이후에나 쓰는 중년의 문학이라고 곡해하여 황혼기의 파적거리쯤으로 여기는 풍토는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청년 이상(李箱)의 수필이 다이아몬드라면 피천득의 수필은 비취다. 이상의 수필이 쇳물에서 끓는 정열의 불꽃이라면 피천득의 수필은 운치 있는 관조의 가로등과 같은 것이다. 이 중에 하나를 취하였다고 어찌 하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젊은 수필가들의 출현을 위해서는 대구 수필문단의 준령과도 같은 '영남수필문학회', '대구수필문학회' 등 수필문학 단체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차대하다. 그 외에도 아직은 작은 몸짓이지만 뜻밖에도 크게 감지되는 몇몇 수필 창작 교실의 움직임도 내일의 대구수필을 위해 주목해야 할 것이다.
  평자가 자성을 앞세워 수필문단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한 것 같아 스스로 곤혹스럽다. 혹자는 이러한 지적이 지루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저급한 잡문들이 수필문학의 본질을 어지럽히는 한 이러한 지적은 계속되어야 한다.

2.
  대구문학 지난호에는 특집으로 마련된 이재호의 수필 여덟 편을 비롯하여 모두 열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재호의 작품 읽기에는 함께 수록된 그의 '문학적 자전(自傳)'이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사족을 붙이면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돌아오기'와 '들여다보기'의 작업이 감동적이다. '돌아오기'와 '들여다보기'는 귀소본능 또는 과거 지향적 노스탤지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우연인지 의도된 선작(選作)인지 몰라도 8편의 작품 중에는 기행수필의 옷을 빌린 작품이「사벌 왕릉을 찾아서」를 비롯하여 절반이나 된다.

  이천 년이 고스란히 진공된 어느 부자 상인집 정원에서 여독을 풀며 베수비오 화산 위를 흐르는 흰구름을 보다 문득 고향의 사벌 왕릉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흩어진 산성의 흔적들. 철저히 풍화되고, 세월의 지층에 매몰된 왕국의 古邑. 암호같이 널려 있는 기왓장, 돌들.
  세월의 이끼에 전설도 잃어버린 왕국의 황량한 왕릉이 그리움 같이 떠올랐다.
  '참 어리석게도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이 진기한 곳에 왔으면 감탄하면서 열심히 구경할 것이지, 엉뚱한 사벌 왕릉은 왜 생각해' 하면서도 향수처럼 사벌 왕릉을 환상했다.    -이재호,「사벌 왕릉을 찾아서」中에서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길떠나는 몸짓을 하면서도 결국 탄력 좋은 고무줄에 매인 듯 돌아오는 길을 밟는다. 그가 왜 그렇게 '돌아오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그가 간직하고 있는 삶의 흔적에 깊은 애착을 느끼는 듯하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 흔적이 낡은 영사기의 화면인지, 순간순간 멈추었던 매듭의 시간인지는 몰라도 그가 지향하는 바는 소우주와 통하는 길임에 틀림없다. 소우주는 자아이고 자아는 중심이다. 중심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명징한 가슴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애써 잘 차려입은 자신의 옷을 한꺼풀씩 벗으며 '돌아오기'와 '들여다보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김금수의 「요시하라 선생傳」은 앞에서 언급한 이재호의 작품  중에「석 장의 지폐」와 닮은꼴이다. 글감은 물론이고 만남-사별-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구조까지 흡사하다. 두 작가는 이 작품을 쓰고 싶어 오래 별렀을 것이다. 험난한 인생 항로에서 자아의 실존을 가능케 한 부모와 이에 버금가는 은사(恩師)에 대한 글쓰기는 문학적 형상화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문학인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감상에 치우쳐 그 앙금은 천편일률로 남기 쉽다. 다시 말해 누구나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있기에 공명의 진폭은 쉽게 넓힐 수 있으나, 감동을 뛰어넘어 이상과 꿈에 이르는데는 한계가 있어 이러한 글의 양산(量産)을 경계하는 것이다.
  최계순의 「사랑의 환희」를 대하면서 약간의 우려가 앞섰다. 너무나 흔한 글감이기도 하였거니와 한국 수필가들은 개별적인 체험을 다루는데는 세련된 반면 관념적인 사유를 다루는 작업에는 익숙하지 못한 경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계순은 절묘한 기교로서 이러한 우려를 깨끗이 씻어냈다. 그는 마치 언어의 조련사처럼 다의적인 함축어의 덩어리들을 적재적소에 연결함으로써 넋두리에 불과한 사랑타령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를 나만큼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참으로 위대하고도 신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지는 그래서 한 사람의 취미와 성격과 살아온 세월들을 알아가면서 비로소 만나보지 못한 한 세상과 이해라는 이름의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그 특별한 매혹과 이미지와 집중력은 생애의 날들에서 얼마나 희귀한 날들로 각인되는가.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목마름과 뚜렷한 생기와 탄력과에 뜨거운 에너지의 창출은 평범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어떤 길이다.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묘미에 취해 보면서 그대 사랑의 환희에 절절 끊어 볼 것이다. 사랑이 가리키고 있는 곳, 그 끝없는 욕망의 집착과 도취와 흔들림 속에서 때론 피곤과 실패의 연속일지라도 그 욕망의 끝은 늘 황홀한 시작인 것이다. -최계순, 「사랑의 환희」中에서

  인용문을 보다시피 미려한 문장이다. 때로 미문(美文)은 내용이 없다는 공격을 받기는 하나 관념어, 추상어, 함축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행간을 키우고 의미를 증폭시키는 기교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하다.
  이원우의「거짓말」은 과대광고, 거짓 광고의 부작용을 글감으로 삼아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본 현실 인식의 수필이다.
  문학은 어떤 형태로든 그 시대와 사회를 담고 있으며,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들은 문학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그러므로 작가가 현실에 대해 소신을 표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가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만나면 비류직하의 폭포처럼 곧은 소리를 내야 한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르기 때문이다. 이원우는 엄정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곧은 소리를 내는 수필가이다.

  거짓말로 인해 고통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믿은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 고통뿐이라면, 그로 인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만연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
악의에 찬 거짓말이 없어졌다는 거짓말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원우,「거짓말」中에서  

  이 작품에서 반영하고 있는 현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적 편린들이지만 그 문제들을 어느 시대나 항구적으로 안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는 작가의 힘이 주목된다. 사실 이원우는 불교의 참선을 연상하듯 존재의 본질을 놓고 내적 자아와 은밀히 수수하는 작가로 독자들에게 낯이 익다.   그러나 애초에 그의 천품은 이지(理智)에 가까운 쪽이고, 거기에다 사회적 직분이 맞물려 현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려는 경향이 탄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배화열의 「생활인의 축제」를 읽는다.
인용문을 대신하여 작품의 요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축제는 신성함과 즐거움을 주는 의식 행위다. 그 과정이 즐거움이고, 과정을 통해 거듭나는 결과가 신성함이다. 친구와의 술자리가 축제요, 결혼식과 제사의식도 축제요, 종교 의식도 축제다. 축제는 반드시 속죄양을 필요로 한다. 술자리에서 희생양은 상대방, 가정, 직장, 나라가 된다.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를 희생양으로 삼고, 제사에서는 조상, 종교에서는 신이 속죄양이 된다. 축제는 이들 희생양을 통해 구원을 지향한다. 구원은 축제 참여자의 거듭남으로 확인된다.
  나아가서 문학도 주인공을 희생양으로 삼는 축제다. 결국 문학 활동은 휴머니즘과 카타르시스를 포함한 인간 구원을 지향하는 축제 행위다

  다소 작품이 거칠고 난해하여 정리가 쉽지 않았지만 본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배화열은 논리적인 글을 쓰는 수필가다. 그러나 그의 글이 수필에서 한 발 비껴나 철학이나 윤리학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는 삼십 년이 넘도록 독서회를 이끌어 오면서 동서 고전과 현대문을 두루 꿰찬 보기 드문 독서력의 소유자이다. 최근 그가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모든 문학작품을 미학의 잣대로 해석· 분류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생활인의 축제」도 미의식의 범주에 속하는 구원미나 희생미를 축제에 대입하여 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생소하게 보이겠지만 독자적인 영역을 넓히려는 고뇌의 작업임에 틀림없다.
  윤길수의 「봉봉 타는 아이들」을 읽으면서 수필의 재미를 느낀다. 일상을 참신하게 형상화하여 마치 수필 작법의 텍스트를 보는 것 같다. 수필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일상'을 '신변' 운운하면서 낮춰보려 한다. 수필가가 일상을 떠나서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일상이 아니라 참신한 해석의 도달 여부에 있다.
 「봉봉 타는 아이들」은 작가가 글의 짜임을 이미 다섯 단락으로 가름해 놓았다. 하지만 1,2 단락을 하나로, 4,5 단락을 하나로 묶어 모두 세 개의 단락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1,2단락에서는 일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였고, 3단락에서는 과거 회상을 통해 일상을 자아에 오버랩시켰으며, 4,5단락은 일상을 내면화하였다. 3단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으므로 결국 이 작품은 1,2단락과 4,5단락으로 양분된다. 그렇게 보면 어쩐지 전반부가 후반부에 비해 지루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거뜬히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한 것은 글의 구조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봉봉을 타는 유소년과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는 노년이 날줄과 씨줄로 얽어 있으며, 유소년의 상승 이미지와 노년의 하강 이미지가 또 다른 그물을 형성하여 틀을 이룬다.
  순리를 거슬러 가는 사고의 파격도 이 작품을 살리는 요소이다. 퇴행성 관절염을 앓을 만큼 긴 여정을 달려온 노년이 오히려 유소년으로부터 상승 이미지를 학습하겠다는 발상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어디에도 어렵게 읽히는 곳이 없다. 그렇다고 고뇌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솜뭉치에 물이 스며들 듯 삶이 소리 없이 녹아 있다. 좋은 수필은 이처럼 쉽고 재미가 있으며 곱씹을수록 새롭게 우러나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박명희의 「친구의 이야기」는 수필의 시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수필은 '나'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대부분이다. 수필이 고백의 문학이고 보면 당연한 이치다. '그는 프라스틱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로 시작하는「친구의 이야기」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다. '나'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 '그'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의 말을 '나'가 듣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불편한 인간 관계의 짐들을 어쩌면 저 거울을 바라보며 정리하였을지 모른다. 후둑후둑 찬물로 대강 세수를 한 후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운 것은 비누로 깨끗이 씻어내고, 입안 가득 모여 있는 찌꺼기까지 양치질로 헹굼을 하여 저 거울 앞에 서서 중간쯤으로 정리하였을 것 같다. 비록 태어날 당시의 순백의 영혼이 아닐지라도 그 가까이 다가서려 노력하였을 것 같다.(중략)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두고 가더라. 손을 펴니 잡은 것 주루루 흘러 모두 두고 가더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두고 가더라. 모두 두고 가더라. 투명한 피부빛을 한 아들과 사과를 깨어무는 딸의 모습도 두고 가더라. 청자빛 도자기와 삼성자동차도 두고 가더라. 날마다 쓸어안고 자던 양피 지갑도 두고 갔으며, 흐뭇하여 달고 다니던 명찰도 두고 가더라. 울리 안으로 침입한 먼지를 못마땅한 듯 쓸어내던 프라스틱 빗자루도 두고 가더라. 닳지 않고 오래 쓰기 위하여 철물가게에서 산 것인데 그 빗자루도 두고 가더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두고 가더라. 모두 두고 가더라.
-박명희, 「친구의 이야기」中에서

  수필이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때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남의 이야기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점의 다양화는 수필가 정진권에 의해서 여러 번 시도된 바 있다. 정진권은 수필이 굳이 1인칭 주인공 시점만 고집할 이유가 없으며, '나'아닌 '나', '남'의 이야기, 사람이 아닌 '나', 또는 '그'에 따라 시점이 자유롭게 정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평자도 지난 해 대구문학 겨울호에 '나'가 아닌 '남'을 1인칭 주인공으로 설정한 졸작「화령별곡」을 발표하여 시점의 실험성을 시도한 바 있다. 시점의 다양화는 결국 수필의 허구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므로 앞으로 수필문단에서 많은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그 외에 박달원의 「산골마을 사람들」과 한팔용의「가정의 달에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자」도 노작으로, 앞으로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할 작품들이다. 특히 「산골마을 사람들」은 동화와 서간문의 요소가 혼재되어 다각적인 토론이 필요하며,「가정의 달에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자」는 교훈 수필에 관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제한된 지면으로 평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