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발자취*

삶의 실천적 글쓰기

아리솔솔 2009. 12. 26. 19:35

삶의 실천적 글쓰기  

                                 황소지의 수필집 <바다를 닮고 싶다>



신재기




1, 세상을 읽는 따뜻한 시선 

우연하게 연이 닿아 황소지의 수필집 ?바다를 닮고 싶다?에 관한 서평을 쓰게 되었다. 평문을 쓰기 위한 읽기였기 때문에 긴장을 풀고 책 속으로 푹 빠져들지는 못했으나, 단참에 책장을 넘겼고 편안함도 느꼈다. 사실 쏟아지는 수필집 가운데 별 거부감 없이 한숨에 독파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런 편안한 독서가 가능했던 까닭은 그의 작품이 일상을 매우 진솔하게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 수필집에는 그의 생활에서 배어나오는 섬세한 생각과 정서의 무늬가 잘 그려져 있다.  굳이 비유한다면 그 모습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이다. 무엇을 힘주어 주장하거나 말하지 않고, 일상의 조각들을 소박하게 제시하고 엮어나간다. 작가는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의 쪽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니 일상의 여러 체험을 해석하여 의미를 만들어 내거나, 그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인간 삶과 현실에 대해 상투적인 해석을 내리거나 설익은 철학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다. 그래서 편안했다. 황소지 수필의 매력은 이런 점에서 발견된다. 

개인의 단편적인 체험을 토양으로 삼고 있는 것이 수필 장르의 특징이긴 하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수필가 개인의 사소한 일상으로 쏠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모든 문학은 기본적으로 구체성을 통한 보편적 가치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자질구레한 개인사에 머물면 독자와 공유하는 정서적 공간이 축소되는 것은 뻔하다. 특히 그 개인사가 고백이나 참회보다는 자기 과시나 합리화 쪽으로 흐르는 경우 독자에게 독선으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 이르면 수필은 무너지고 만다. 문학이 아니라 정치나 윤리 교과서로 전락하게 된다. 

황소지의 수필이 머물고 있는 작은 개인사가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다감하게 다가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필은 인간의 삶과 현장을 바라보는 눈이다. 그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수필가의 관점이고 태도라 할 수 있는데, 황소지의 경우 매우 정감 넘치는 눈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 여정의 긴 강을 건너면서 세상을 보는 지혜와 경륜을 쌓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욕망과 논리에 매몰되어 인간적인 순수성을 상실하기가 쉽다. 나이 들수록 시각이 편협해지고 사물을 투명하게 보기가 힘들어진다. ‘처음에 마음’을 유지하면서 맑은 영혼을 가꾸기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런데 수필가 황소지는 언제나 세상과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잃지 않는다.   


수필은 내 주변의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자연과 이웃이 함께하는 따듯한 정(情)의 문학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쉽게 쓰면서 강건한 자세를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수필은 작은 것이, 큰 것에 닿아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저를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상을 받으며>에서

   

시상식에서 한 말인데, 그의 문학관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하찮은 것에도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고, 일상 중에서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며, 자연이나 이웃과 따뜻한 정을 나누고, 작은 것이 큰 의미에 닿아 있음을 깨닫는 일이 수필창작이라고 한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 아름답고 큰 것을 보기 위해서는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수필을 예술이라는 고상하고 초월적인 세계에 두는 사람은 진정한 수필가가 되기 어렵다. 그들은 일상과 사소한 삶의 편린들이 가지는 생생한 의미들을 어떤 이념이나 가치 속에 추상화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념적 코드가 일치하지 않는 독자는 다가가기가 어렵다. 황소지의 수필은 삶의 일상을 따뜻한 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그것을 작품에 자연스럽게 담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메시지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전면화되어 더욱 흡인력을 가진다. 

일상을 따뜻하게 본다는 것은 사소한 일상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때의 관심과 사랑은 모든 일상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가치지향적인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일상적 체험은 일상과 체험으로 분리해 볼 수 있다. 일상이 개인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물리적인 시공간이라고 한다면, 체험은 그 일상을 지평과 맥락으로 하여 유발되는 극적인 경험이다. 극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 생성을 위해 구성되어지고 유동성을 지닌다는 말이다. 체험은 일상이 지속되는 그 시점에 일어나는 물리적 경험이 아니라, 기억되는 순간에 현재성을 가지고 구성되는 의미적 표상이다. 사실 일상은 속성상 극적인 체험들을 질식시켜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평준화시켜버린다. 반면에 하나의 의미 담지체로 기억되고 정리되는 체험은 일상의 무한한 지평과 맥락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것에 매몰되기를 거부한다. 일상에서 체험으로 나가는 과정이 수필쓰기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수필가는 일상에서 체험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세상과 인간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여기서 수필가의 고유한 세계관과 인생관이 작동한다. 대체로 가정과 가족, 종교, 문학, 여행 등에 관한 체험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황소지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따뜻한 시각과, 대상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일관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2. 삶의 문제로서 죽음

인간 삶의 뿌리는 언제나 시간과 맞물려 있다. 일상은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와 같이 시간의 흐름을 흡수한다. 그래서 늘 시간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이 일상이다. 또한 시간은 지루하게 연속되는 일상의 권태와 무의미를 해소하고 삶을 변화시켜 다양한 의미를 생성한다. 인간의 삶과 맞물려 있는 시간은 머물지 않고 흐른다. 시간의 흐름은 변화이고 변화는 생성이며 생명이다. 즉 개인적인 삶의 실존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의식이고, 시간에 대한 의식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가지 못한다. 죽음은 삶에 마지막 자락에 붙어 있는 한 순간이 아니고 삶 속에 녹아서 인생의 가치와 다양한 정서를 유발한다. 죽음에 대한 사유와 명상이 바로 삶에 대한 사유고 명상이다. 문학이 인간 삶에 대한 이야기고 수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한다면, 문학이나 수필이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작가의 개성과 사상이 구현될 따름이다.

황소지의 수필에 녹아있는 중요한 사색 중에 하나가 죽음이다. 그는 아들딸 모두 출가시켰고, 남편의 고희도 맞이했으며, 딸로부터 수의를 선물 받기까지 했다. 나이는 나이에 불과하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이 인생사의 진실이니, 작가의 개인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사회 통념이나 관습이 그에게 ‘늙음’이란 꼬리표를 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작가가 인생 뒷자락으로 이어지는 노년의 삶 속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필가 황소지는 죽음을 철학적으로 깊이 해석하거나 초월적인 종교와 결부시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그의 사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죽음에 관한 황소지의 생각은 “죽음이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죽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생은 허무하고, 삶의 현실에 대한 집착과 욕망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며, 죽음을 외면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운명적인 것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자신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그 엄연한 진리를 망각하고 어리석게도 현실적인 삶에 욕망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3인칭의 죽음은 사실이지만, 1인칭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래에 예상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간격은 삶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죽음은 죽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삶의 문제다. 죽음에서 촉발되는 구체적인 의미와 정서는 언제나 나의 죽음과 관계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죽음은 바로 내 삶의 고유한 과제다. 죽음에 대한 소중한 사유는 죽음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논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로서 죽음에 맞대면하는 자세이다.


①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는 죽는다. 아니 어쩌면 죽기 위해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엄연한 운명인데도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사는 이는 별로 없다. 불행이란 나오는 상관없는 남의 일로만 여기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인간의 유한성에 놀라며-(중략)-통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큰 충격이었던 것은 점점 작은 것이 되어 생활 뒷전으로 밀려나고 일상이 큰 것이 되어 우리 앞에 채워지곤 했다.

                           -<진정 소중한 것은>에서


②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피할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면서 무엇을 받았으며 무엇을 했는가. 내가 받은 탤런트는 무엇이었으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자신이나 이웃을 위해 유용하게 썼는가. 죽음이 삶을 빼앗아 가는 허무한 것일지라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은 또 무엇인가.

-<마지막 선물>


①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말한다. 죽음은 일상 속에서 큰 것으로 부각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상 속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때로는 크고 무겁게 다가오지만 때로는 작고 가벼운 것이 죽음이라는 말이다. 또한 죽음이 무겁고 삶이 가벼운 것도 아니고, 삶이 무겁고 죽음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죽음과 삶, 무거움과 가벼움, 큰 것과 작은 것이 둘로 구분되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암시한다. 이승과 저승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밤과 낮처럼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인 것이 철리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철리를 인식하는 것보다 둘로 나눠져 있는 듯한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삶의 태도다. ②에서 작가는 죽음은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둠으로써 삶을 반추하는 기회를 가지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게 된다는 것이다. 삶의 풍요와 가치 생성은 그 삶이 죽음에 비춰져 고양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황소지에 있어 죽음은 인생을 무상하게 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이지만, 일상의 삶과 연결된 자리에 있으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하는 자성의 촉매다. 죽음을 제쳐두고 삶만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인생의 비극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죽음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을 연약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삶은 비극적인 것만도 아니고, 연약한 것만도 아니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삶에 대한 사유를 보완한다. 수필가 황소지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충만한 삶을 위해 죽음을 수용한다. 죽음에 관한 그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유는 늙음에서 오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충만하고 행복한 실존을 위해 설계된 것이다. 그는 죽음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의 실천을 계획한다. 그래서 “돌아보이 칠순이라는 마디는 가깝고도 현기증이 나게 먼 인생의 고개였구나 싶다. 이제 우리가 새겨야 할 마디는 무엇인가. 참회하고 감사하며 받은 만큼 사랑을 나누며 아름답게 여생을 마무리하는 일이다.”(<고희의 언덕>에서) 라는 말한다.   


3. 작가 자신에게 말 걸기 .

언뜻 보면 황소지 수필은 다른 여타 수필가의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가정과 가족, 종교, 문학, 여행 등과 같은 일상사에서 글감을 골라 특별하지 않은, 누구나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정서들을 엮어낸다. 작품의 내용, 주제, 구성, 문체 등 어느 측면에서도 황소지의 문학적 개성을 변별할 수 있는 특별한 징후를 금방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면 그의 수필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그의 문학을 구축하고 있는 고유한 문법을 발견하게 되면, 황소지의 수필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 마다로 말하면, 그의 수필은 ‘삶의 실천적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는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글을 쓰면서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면 인간을 오히려 욕되게 하는 일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부분 글을 위해 글을 쓴다. 황소지에 의하면 글쓰기의 진정한 목적은 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글을 쓰는 일’과 ‘사람답게 사는 일’을 하나로 보고 있다. 특히 삶의 성찰을 추구하는 수필이 실제의 삶과 분리되어 공허한 관념이나 언어적 쾌감에 빠지고 마는 것은 수필을 포기하는 일이며, 사람과 수필을 모두 욕되게 하는 처사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문학이 실제의 생활과 분리되어서 안 된다는 입장이다. 즉 문학적 가치를 위해 생활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수필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다. 이런 것을 ‘삶의 실천적 글쓰기’라고 부를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충실하고 진지하게 살겠다는 의지가 이러한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 수필 쓰기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충실하고 진지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이고 그 실천이다. 황소지의 수필은 작가 자신의 실천적 삶의 일부다. 우리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삶의 실천적 글쓰기로서 그의 수필창작방법론은 오랜 창작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된 것이다. 어쩌면 본인도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특정한 문학이론이나 이념에 의해 구축된 창작방법은 대체로 전략적이고, 그런 만큼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이 경우 다양한 방법과 기교를 앞세운다. ‘글쓰기’는 ‘글 만들기’가 된다. 물론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구성되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필도 미적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는 문학이고자 한다면 구성이 필요하다. 모든 글쓰기 자체가 전체의 통일성을 향해 부분들의 의도적 결합이란 점에서 수필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한다. 일단은 장르의 특성상 허구를 배제하는 것이 관례다. 물론 실제의 체험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수필작품에 담겨진 사태나 생각이 실제 있었던 것으로 인정한다. 수필작품의 설득력은 여기서 생성된다.  황소지의 ‘삶의 실천적 글쓰기’가 감동적인 것은 다가오는 까닭을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명절 때마다 색동 한복 바지저고리에 두건을 쓰고는 넙죽 어른들을 따라 절하는 모습이며, 가끔 만나는 형들과 누나에게 생글거리며 재롱을 부리는 것도 여간 귀엽지 않다. 현관에 옹기종기 놓여 있는 손자들의 신발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내가 저 아이들 할머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수민의의 운동화>에서  


할머니인 필자가 명절 때 만난 손자들을 두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만약 이같이 전혀 가공되지 않은 사적인 일상이 다른 수필가의 작품에 나타나면 문학작품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손자 자랑을 한다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 그런데 황소지 수필에서 이러한 사적인 일상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의 수필의 고유성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황소지만의 수필문법을 발견한다. 말 할 것과 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지울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말하기다. 어떤 의미와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의도적으로 조합하는 글쓰기가 아니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때 체험의 뒤에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따라 오는 듯하다.

 황소지의 삶의 실천적 글쓰기로서 수필쓰기 문법은 독자에게 말하기가 아니라 작가 스스로에게 말하기 형식이다. 좋은 글은 독자에게 얼마나 유익하고 흥미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글은 소통을 우선했고, 글로 씌여진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어야 했다. 더욱이 문학은 대상에 관한 발화자의 정서를 표현하는 쪽보다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심미적 통일체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길들여지고 단련되어왔다. 허구적 장치와 구성미의 필요성이 여기서 마련된다. 오늘날의 우리의 수필도 그 평가의 중심에는 독자와의 소통을 통한 감동이라는 기준점이 요지부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독자에 다가가 쉽게 읽힐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좋은 글이고 수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글쓰기의 의의를 독자와 소통에만 한정하는 것은 언어활동을 지나치게 도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글쓰는 이, 즉 작가의 테두리 안에서 우물거리는 언어도 문제가 있지만, 독자를 고려하여 작가적 요소를 매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황소지의 수필쓰기는 독자를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특별한 형식을 기획하지 않는다. 수필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말 걸기라는 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는 눈길을 강하게 끈다. 

황소지는 두 배의 몫을 사는 수필가다. 손자를 사랑하고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하는 삶이 그 하나고, 이를 작품에 담아내는 삶이 다른 하나다. 그에게 이 둘은 하나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커 보이고, 그의 수필은 더욱 풍성한 것 같다. ♠



신재기 : 경북 의성 출생.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고려대학교 박사, 『매일신문』신춘문예 평론, 현 경일대학교 교육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평론집 『비평의 자의식』, 『여백과 겸손』, 산문집 『언어의 무늬와 빛깔』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