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문학을 공부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아리솔솔 2010. 1. 29. 00:39

문학을 공부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未堂 서정주


나는 갓 젊은 청소년 시절에는<인생의 진리는 무엇이냐?>하는
것을 열심히 생각하고 지내던 말하자면 사상소년(思想少年)이어서,
동서양의 이것을 공부하기 위해 학교도 이것들의 대강을 요약해
가르치는 곳을 찾어 동국대학교 철학과(중앙불교전문학교 철학문학
고)에 들어갔던 것인데, 거기에서 글쓰는 걸 연습하면서 곰곰이 생
각해 보니<사상은 그 진리라고 머리로 생각한 것을 이론으로 쓰면
되겠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그 정서(情緖)라는 것들은 시나 산문문
학으로 표현할밖에는 딴 수가 없겠다. 시나 산문문학이면 사상도
아울러서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 깨달아져서, 시나 수필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을 표현해 보기 시작한 것이 어느 사인
지 길이 들어 문학적 문장의 표현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내게는 참 다행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뒤
에 깨달아 안 일이지만 <니체>만 하더라도 그의 사상의 표현을 실
감 있게 하기 위해 그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에서는 서
사시적인 문학적 구성과 표현을 했었으며, 20세기에 와서는 평론
들까지도 딱딱한 이론전개를 피해 <에세이>라는 것으로 문학적 표
현의 효력을 노리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먼 과거로 눈을 돌려보면 불교나 기독교, 유교의 경전들 역시 문학
적 표현으로서 그 중요한 것들이 나타나 있음을 누구나 보게 되는
것이니, 이거야말로 인류가 발견한 정신 표현의 가장 정수라고 아
니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시인이나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써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정신의 완전한 자유다. 어떤 개인
이나 단체의 강제에도 얽매이는 일이 없이, 또 사상사 속의 어떤
유파나 개인에게도 편승하는 일이 없이, 먼저 하늘만큼 훤출한 자
기자유의 능동적인 관찰력과 자기류의 독자적인 느낌을 가지고 사
사상의 선택과 그 수립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나는 1929년과 1930년의 두 해 동안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
(현재의 중앙중고등학교를 합친 것)의 한 학생으로 1950년대에는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의 중앙학교 주모자의 하나이기도 했었는데,
이때의 내 사상은 덜 익은 사회주의였다. 이때의 내 정신의 실상
을 회고해 보자면 <가난하고 비참한 동포들을 서러워하는 감상적
인 인도주의 감정> 그것이었는데, 이때는 그 사회주의라는 것이
이 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많이 유행하고 있던 때인만치 그런
군중운동 속에 나도 흡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 도서관에 파묻혀 문학작품들을 탐독하면서 한 문
학소년으로 변화하고 있던 때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자니, 톨스토
이 말씀마따나 <경제적 균등 한 가지의 해결로 어떻게 인생의 그
넓고도 미묘하게 복잡한 불행이나 행복이 두루 잘 해결될 수가 있
겠느냐?>하는 새로운 이해가 생겨서, 여기에서 재출발해 문학작품
들의 탐독과 아울러 종교와 철학을 주로 한 사상들의 공부에도 열
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보니 또 이때는 우리나라의 정지용(鄭芝溶), 김영랑(金
永郞), 박용철(朴龍喆)등의 시인들이 《시문학》(詩文學)이라는 시
동인지를 내면서 순수시 운동을 하며〈사회주의 정치사상에서 시
정신의 자유를 먼저 해방해야 한다〉는 걸 주장하고 있는 것이 눈
에 번쩍 뜨여서 이런 선배동지들이 여간 반갑고 고마운게 아니었다.


이 점, 젊은 여러분에게도 크게 짚이는 데가 있기를 바랄 따름이 다.
한동안 구소련을 비롯해서 온 세계에 유행하고 있었던 그 사회
주의의 〈빈부격차의 해소운동〉이라는 경제정치 중심의 사상이
실효 없이 끝나면서, 인제야 인류는 다시 그 반성기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잘 명심해 생각해서 말이다.


이 나라에서 새로 시인이나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또 먼저 마
음을 써야 할 것은 첫째 영어나 불어 같은 서양말이나 중국의 한문
에도 길드는 일이다. 우리 이웃나라인 일본만 하더라도 세계의 문
학을 비롯한 학문들의 번역출판이 구체적으로 빈틈 없어서 일본말
의 번역만 가지고도 문학이나 기타 학문의 기본교양을 마련하기엔
부족함이 없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2차대전 뒤 민족분열과 6·25
의 남북전쟁과 생활난과 여러가지 혼란을 겪느라고 번역문화 그것
도 아직도 형편없는 실정에 놓여 있으니 여기에선 서양말이라도 하
나 둘 유창해야만이 보충이 되겠고, 중국의 한문은 또 별도로 공부
해 내야만 이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중국과 동양과 우리나라의 고전
들을 읽어 알 수가 있으니 말씀이다. 힘드는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의 그 팔자라는 것이니 할 수 있는가?


문학작품을 습작하고 지내는 어떤 젊은이들은 생각하기를 〈시인
이나 작가가 되려면 그 소질이 첫째 문제다. 거기 필요한 교양이라
는 거야 시인이나 작가노릇을 하면서 두고두고 공부해서 쌓아 나
가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미리 다 쌓아 가지고 나갈 수가 있나?〉
하는 것 같지만 언뜻 보기엔 지당해 보이는 이런 이해 속에도 간과
해서는 안될 하자가 들어 있으니, 그것은〈자기 혼자나 주의의 몇
사람이 인중한 것뿐인 그 소질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도 애매할 뿐
이라〉는 하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하자의 불안을 메꾸고 자기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을까?
그 확신을 만들어 가지는 길은 물론 내 나라의 문학과 세계문학
의 공부를 통해서일밖에 없다. 먼저 우리나라의 현대문학과 고전
문학 속에서 100사람의 대표적인 실력 있는 시인 작가들의 대표작
품들을 골라 정독하며 그 속에서 귀군의 실력은 어느 만큼의 것인
가를 이해해 내고, 또 세계문학의 현대 시인 작가들과 고전 시인
작가들 200명을 골라 그 작품들을 정독하면서 자기의 실력은 어느
만큼한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이해해 내라. 그러면서 내 나라의 문
학의 역사를 비롯해 세계의 유력한 문화국가들의 그것들도 꼼꼼이
공부해 알아보며 그 문학사들 속의 각 시대를 통한 유파들의 사조
(思潮) 내용과 거기 속한 대표적인 시인 작가들의 작품 특질이 무엇
인가도 판독해 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대가 한 문인으로 이유 있
게 출발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기본교양은 겨우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자네의 그 소질 있다는 습작이 어느 정도 수준의 것인가
를 식별하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내 나라 문학사와 세계 문학사 속
의 유력한 시인 작가들의 좋다는 작품들의 표현과 자네의 작품들
의 표현을 면밀하게 대조해 고찰해 보고 〈그들보다 한술 더 뜰 확
신이 있는가? 없는가?〉자신의 양심에 물을 일이다. 그래서 자네
마음속의 대답이〈있다〉거든 비로소 자네의 좋은 소질이라는 것은
자네 자신의 확신을 얻어 나가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
러나 늘 마음 써야 할 것은 이런 초벌의 확신 이것도 변화 없이 계
속되어 가는 것만도 아닌 점인, 자네의 공부와 교양이 점점 늘어
넓어져 가고 깊어져 가는 동안에는 전일의 확신이라는 그것도 한
낱 유치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한 문학인의 교양이란 꼭 문학 그것만의 한계 안에서만 멎
을 수 없는 것이고, 종교와 철학, 역사, 지리, 그 밖에 필요한 여
러 학문에 걸쳐야만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유치
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늘 명심해야만 된다.


일생 동안 문학공부를 하고 글쓰고 살려는 사람들이 또 늘 이어
서 마음을 써야 할 것은 〈1. 어떻게 사회에서 사람노릇을 제대로 하
며 살아갈 것인가? 2. 사회의 모태인 자연과의 관계는 어떻게 잘
이어 갈 것인가? 3. 역사 속의 자기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서 세
워 나갈 것인가?〉하는 세 가지 문제다.


이 첫번째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한 민족사회를 지배하는 정치권력이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나치
스 시절이나 2차대전 말기의 일본의〈도죠히데끼〉의 군국주의 시절
이나 스탈린을 비롯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시절같이 개인의
자유와 평화와 가족적 번영을 못 견디게 억압하는 때에 놓이어서
어떤 항거도 성취할 가능성이 없거든 어떻게라도 해서 여기서 탈
출하거나 그것도 안되건 침묵하는 수풀의 나무들처럼 침묵하는 속
에서 그 강압 정권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무너질 날을 기다리며 살
아 남아 갈밖에 없겠다.


그리고 둘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또 아래와 같다.
자연을 마치 오랫동안 버려운 고향집같이 생각해서 어쩌다가 한
번씩 찾아들면 되는 것으로 간주하지 말고, 우리가 늘 이어서 숨쉬
며 살고 있는 이 숨결의 모태로서 느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그 예
부터의 느낌과 사고방식을 회복해 사는 것이 좋겠다. 아무리 복잡
하고 바쁜 일터에서라도 때때로 허리를 피고 하늘 ?各? 보며 거기
가 우리들의 숨결의 본고장임을 실감해 살도록 해라. 그래 이 실감
이 더 간절해지면 더 간절해질수록 그대의 목숨의 계속에도 더 좋
을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짬을 얻어 맑은 수풀 속도 거닐고,
바닷가의 한때씩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뭇 생명들의 본
고향과의 교류를 점점 더 두터이 해가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에서
생기는 온갖 협소함을 완화하고 키워갈 수 있는 것이다.


셋째번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또 아래와 같다.
문학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무얼하는 누구거나 다 그래야만
할 것이지만, 우리는 늘 역사 속에서 무얼하고 있다는 역사적 의식
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문학
사가 이룬 문학업적들을 현대문학의 관점에서 취사선택해 발전시
키는 각도에서 작품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니, 또한 여기에서 미래
의 문학을 위한 좋은 유산이 되어야 할 것도 자연히 의도하며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문학작품을 쓰는 이가 안 가져서는
안될 역사의식이라고 한다. 이것이 없으면 그것은 그걸 쓰는 본인
들에게도 그저 불확실한 것이 될 뿐일 것이다.



- '未堂산문'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