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들림시*

강가에서/김수영

아리솔솔 2009. 12. 23. 14:23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 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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