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려본 나의 모습 / 이덕무
호색하는 사람은 골수가 마르고 살이 빠지다가 다 죽게 된 날 저녁에도 불같은 욕정이 솟구치면서 끝내 뉘우치는 마음이 없다 한다.
이는 그가 호색에 굶주려 죽은 귀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런 사람을 비웃기도 하고 가엾게 생각하기도 하고 두려워도 하고 경계하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내 자신이 그와 비슷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
요즘 나는 유행하는 풍열 때문에 오른쪽 눈이 가렵고 아프다.
사람들이 자꾸 책병이라고 놀리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런 점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그
러나 단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매번 실눈을 뜨고
글자와 먹 사이의 정수에 집중할 때면 맥망脈望이 신선神仙이라는 글자만을 갉아먹는 방법으로
책을 읽고는 했으니, 저 호색 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당연히 나를 비웃을 것이다. 9
월 그믐날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는 이렇게 실없이 쓴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운 뜻도, 일정한 스승도 없어서 고루하고 견문이 적은 사람이었다.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는 내가 그나마도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나는 바둑을 둘 줄 모르고, 소설을 볼 줄 모르며, 여색에 대해 말할 줄 모르고, 담배를 피울 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네 가지를 비록 죽을 때까지 잘하지 못한다 하여도 해가 되는 것은 없다.
만약 자식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나는 당연히 먼저 이 네 가지를 하지 않도록 그들을 이끌 것이다.
한번은 비오는 날 누워서 평생 동안 남에게 빌린 물건을 생각해 보았는데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 성품이 너무 옹졸한지라 남이 조금이라도 어려워하는 기미가 보이면 차마 입을 열지 못했고,
상대방이 나에게 빌려주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는 걸 분면이 알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말을 건넸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경우는 단지 예닐곱 번뿐이었고 그때를 빼고는 모두 걸어다녔다.
혹시 남에게 하인이나 말을 빌려올 때면, 그 하인이나 말이 배가 고프거나 피곤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오히려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보다 편치 못하였다.
또 한번은 부모님께서 편찮으신데도 약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친척에게 돈 백 문文과 쌀 몇 말을 빌렸다.
그러나 아내가 병이 들어서 기운이 크게 약해져 친척에게 약을 빌렸을 때는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이 부모님 병환 때와는 달랐다.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워 때때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크게 욕됨을 당하는 일 없이 살아왔다.
나에게는 평생 고치기 어려운 나쁜 버릇이 있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처세에 졸렬한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해 주는 이를 만나면, 산수를 논하고 문장을 이야기하며 민속과 가요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되풀이하며 말하는 것이다.
싫증을 내지 않고 해학과 웃음을 섞어 가면서 밤새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들은 내가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못한다. 그
런데 만약에 상대방이 나와 취미가 맞지 않아서, 그가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것을
그가 알아듣지 못하게 되면, 나는 억지로라도 아무리 웃고 떠들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무정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있는 말을 온통 다 할 수 있지만 그
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잘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늘 기운을 내서 사람들 속에 섞이려 애써보지만, 나이 서른이 가깝도록 끝내 이런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한스럽고 한스럽다.
내 몸은 깡마르고 약골이라 입은 옷조차도 견디지 못할 정도이다.
하지만 남이 음흉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혈기가 솟구쳐 올라 곧 손을 들어 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는 군자의 너그러운 도량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길 때면 나는 항상 경계하고 입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고 되도록 모든 것을 빨리 잊어버리고자 노력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했더니 이제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봐도 평범한 일처럼 여겨져서 마치 바보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남들은 나를 보면서 옳고 그른 것도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하거나
또는 자기 편의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하며, 노자의 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겨왔지만, 사람들이 어찌 내 마음을 제대로 알겠는가.
도량이 너무 좁아서 이미 세상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만회할 만한 올바른 기력도 없으면서, 나의 작은 객기로
남을 욕하고 비판한다면 그것이 어찌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말을 받아들여서 좋은 일을 하는 데 민첩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어찌 그 허물을 남김없이 말하지 않겠는가.
『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
∎ 역주
1. 맥망은 벌레 이름인데, 책 속에서 신선이라는 글자만을 찾아 갉아먹는다고 한다. 크기는 4촌寸쯤 되고 둥근 모양에 모가 없는데,
그것을 쪼개어 보면 양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한다.(『유양잡조酉陽雜俎』, 「지낙고支諾皐」).
여기서는 책을 보면서 정수精髓만을 골라 보는 것을 빗대러 말한 것이다.
* 이덕무 산문집 <책에 미친 바보>, 권정현 편역, 미다스북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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