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
옛사랑
이정은(소설가)
봄이 왔습니다. 덕수궁 후원에 벚꽃과 목련이 터지기 시작하니 말입니다. 계절이든 사랑이든 나는 머리가 알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나 봅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심란한 마음으로 덕수궁을 찾았는데 언제 터졌는지 봄꽃들은 이미 고개를 내밀고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봄을 좋아하는 이는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데 어찌 된 일일까요. 나는 피어나는 꽃들과 한들거리는 여인들의 치맛자락을 보면 오히려 슬퍼지고 그래서 봄이 좋으니 말입니다. 지난가을부터 목이 늘어지도록 기다렸답니다. 적어도 내게 자연이 주는 네 계절 중 가장 기쁜 마음으로 맞을 수 있는 때이니 생일을 꼽는 어린아이의 마음만 하겠지요.
지난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바람도 없이 두터운 구름이 나지막하게 깔려 추적추적 가을비라도 내릴 것 같았습니다. 서영은 선생님의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요. 그분의 수업은 늘 세 시에 시작해서 해가 지고 학교 방송에서 샹송이나 흘러간 팝송이 옅게 깔릴 때쯤 끝나곤 했습니다. 수업 중에 창밖에서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들려왔습니다. 우리는 한창 레이먼드 커버의 작품을 토론 중이었지요.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일상에 관한 것들이었지요.
갑자기 한 친구가 대뜸 선생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랑을 해보셨나요?”
사랑에 관한 소설을 토론 중이었으니 나올 법한 물음이기도 했지만 그 질문은 참으로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미 선생님의 지난 사랑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터라 약간의 기대를 안고 답을 기다렸습니다. 선생님은 대답 대신 잠깐의 침묵과 무언가 많은 감정이 섞인 듯한 눈빛을 보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신을 떠올리는 일은 구차하다고 여겼습니다. 뜨겁게 사랑했으니 차갑게 지워버리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의 그 눈빛이 저를 흔들었습니다. 슬프지도 외롭지도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은 그 눈빛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잔잔한 파도가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를 그 눈에서 본 듯했답니다.
당신, 여전히 풋사과 같던 스무 살 청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덕수궁 돌담 아래서 수줍게 키스하던 당신이 그립습니다. 처음 당신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때 치맛단 아래 떨리는 무릎이 들킬까 봐 발끝에 힘을 주어 걷던 나의 모습도 그립습니다. 당신과 함께 일상에서 서로가 지겨워질 때까지 살아보고 싶었던 그 마음과 시간은 이미 흘러가고 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가을 저는 그분의 눈빛을 보고 간절히 봄을 기다려왔습니다. 마음껏 당신을 그리워할 이 봄을 참으로 오랫동안 말입니다.
아, 빗방울 하나가 꽃망울을 건드리자 벚꽃 한 개가 터집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지금 당신이 곁에 있다면 저 꽃잎을 입 안에 넣었다가 향기를 머금은 채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를 선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 당신은 내 곁에 없고 마음에 있으니 향기만이라도 흠뻑 들이마셔 마음속 깊은 속의 그대에게 보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