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그녀와 마주하는 시간

아리솔솔 2014. 6. 5. 08:51

 

 

 

 

그녀와 마주하는 시간/ 김영인

 

 

 

  언제부턴가 그녀와 마주하는 시간은 행복이 되었다.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전부를 알아가는 일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과 작가를 합일시키는 일에 나는 본능적이라 할 만큼 뛰어나고 빠르게 작업을 끝내버린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글과 작가 그리고 나와의 합일일 것이다. 그를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은 오직 글뿐이지만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응시했던 그의 시간들은 언제나 나를 유혹하며 황홀하게 한다. 한 치의 의문이나 망설임 없이 그 안에 나의 전부를 밀어 넣곤 한다. 그래서 그가 쓴 문장이며 단어 하나하나까지 찾아내다가 끝내 교감이 끊겼을 때의 목마름은 한동안 깊은 슬픔을 달고 다니게 한다. 또 다른 사랑을 만난 후에야 살며시 그를 놓아주고는 한다.

  서영은의 또 다른 글과 마주하고 있다.

  처음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김동리라는 문학계 거목이 품었던 여인이라는 것, 그 점에 호기심을 갖고 넌지시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말이다. 그저 통상적인 불륜, 낙인 안에서 행보를 좇아갔던 것이다. 아니 난 내 나름의 상상력을 펼치면서 늙은 남자 품으로 뛰어든 서영은이라는 젊은 예술가의 숨겨진 심리와 거장의 탐욕을 포착하려 했었다. 젊은 작가의 왜곡된 창작욕이 빚어낸 행로는 아닐까, 시들어가는 창작욕의 생명수로써 젊디젊은 한 여자를 붙잡고 있는 늙은 거인의 욕망은 아닐까 하면서. 늙은 작가에게 제 젊음을 기꺼이 내줄 용기를 가졌다면 그에게는 분명 범상한 뭔가가 있을 것이다. 예술적 광기를 지닌 예술가라면 내 전부를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예술지상주의였던 예전의 난 그랬었다. 그녀도 혹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영혼과의 합일 추구, 예술가는 그래야만 하고 용납할 수 있다고 외쳤었다.

  서영은, 그녀는 멀대와 같은 큰 키에 바짝 마른 몸매, 가는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첫눈에서 멀어지게 하는 인상이었다. 한 예술가가 숨겨두고 사랑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일 거라는 상상을 단박에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글 길을 따라가 보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빚어내는 하나의 교감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언어, 언어와 언어가 살을 비비면서 내는 소리인 듯도 하고, 상처 입은 존재들의 소리 없는 절규 같기도 하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장 아프고 추운 곳에, 가장 적막하고 메마른 곳에 스스럼없이 던져 넣으면서 그 고통 안에서 고귀한 별 하나를 건져낼 줄 알았다. ‘슬픔 속에 성지’를 세울 줄 알았다. 그 성지 안에서 탄생한 언어의 몸짓은 강물처럼 느리고 순했으며 은은했다. 그리고 담백했다.

  그를 택한 서영은은 언제나 혼자였다. 서영은을 품은 그 또한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덤덤함 생활 그대로였다. 몸은 같이 하면서도 각각이었다. 무관심이 아닌 영혼을 응시하는 관찰자로서 정신적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듯싶다. 그것은 작가적 영역에 대한 서로의 방어가 아니라 자기를 통해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도록, 기꺼이 내 전부를 관찰하도록 스스로를 내준, 자유로움이면서 운명 지어진 그들의 쇠사슬이었는지 모른다.

  진실한 사랑에는 물리적 거리나 공간 그리고 시간은 의미가 없다. 내가 너를 믿고 네가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신뢰의 뿌리가 제대로 뻗어있고 튼실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충만한 교감이면서 일체의 바람 없는 끝없는 희생이기도 하며 있는 그대로의 바라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꽉 찼기 때문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서로 허락하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 해. 목숨을 지킨다고 생각해야 해.’ 사랑에서건 문학에서건 목숨과도 같이 나를 던져 넣을 수 있는 것. 가장 깊은 곳에서의 너와의 충만한 교감. 가장 낮은 곳에 숨겨진 아픔의 응시. 그리고 그 결핍을 살려내 소리 내게 해 주는 일. 그것을 언어로 그려 내는 일. 아직까지 내게 그런 강렬한 바람과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게 행복이게 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을 찬란한 기쁨이며 위안이게 할 그것은 오직 문학이며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는 항상 혼자이면서도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은 외로움을 간직한 그녀와 마주하는 시간은 언제나 평온하면서 행복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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