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헤르만 헤세
백일홍/ 헤르만 헤세
여름이 서서히 저물고 있는 이즈음에는 공기 속에 그 어떤 명징함이 감돕니다. 그 명징함에 나는 '그림 같은' 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싶습니다. 화가들은 '그림 같은' 이란 말을 '그리기 쉬운' 이란 뜻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러한 명징함은 그리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징함은 그것을 붓으로 표현하고 찬미하도록 무한히 자극합니다. 그럴 것이 그 어떤 색채도 이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빛의 힘, 이 보석 같은 무엇을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 어떤 그늘도 엷어지지 않고서는 이 부드러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또 식물 세계에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색채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이미 가을을 예감케 하지만 본격적인 가을의 현란하고 견고한 색채의 환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정원에는 한 해 중 가장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불처럼 빨간 석류꽃이 피어나고, 그다음에는 달리아와 백일홍, 철 이른 과꽃, 고혹적인 빨간색 후크시아가 피어납니다! 그러나 늦여름과 초가을의 색채가 지니는 정수는 뭐니 뭐니 해도 백일홍입니다! 요즘 나는 이 꽃을 늘 방 안에 놓아둡니다. 다행히도 이 꽃은 수명이 길며, 나는 백일홍 한 다발이 싱싱했다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행복과 호기심의 감정으로 지켜봅니다. 꽃의 세계에는 갓 꺾은 갖가지 색의 싱싱한 백일홍보다 더 화려하고 건강한 꽃이 없습니다. 이 꽃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색채의 환성을 지릅니다. 화려하디 화려한 노란색과 오렌지색, 큰소리로 웃는 빨간색, 놀랍도록 아름다운 적보라색, 이것들은 종종 소박한 시골 처녀의 리본이나 외출복 색깔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강렬한 색깔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배열하거나 섞어버려도 항상 황홀한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백일홍의 갖가지 색깔은 그저 강렬하고 화려한 것만이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며 서로 자극하고 꾸며줍니다.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내가 백일홍의 발견자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이 꽃에 대한 나의 애정을 당신에게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 애정은 내가 오래전부터 사로잡혀 있는 아주 쾌적하고 유익한 감정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아마 노인 특유의 감정이겠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이 애정은 무엇보다 이 꽃이 시들 때 각별해집니다! 화병 안에서 서서히 빛을 잃고 죽어가는 백일홍을 바라보면서 나는 죽음의 춤, 무상함에 대한 동의를 체험합니다. 한편으론 슬프지만 다른 한편으론 소중한 그 동의 말입니다. 사실 가장 무상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죽는다는 것 자체는 아름답고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여, 꺾은 지 여드레나 열흘쯤 된 백일홍 다발을 한번 관찰해보십시요! 그리고 며칠 동안 꽃들이 빛을 잃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모습을 관찰해보십시오! 날마다 여러 번 꽃들을 자세히 관찰해보십시오!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싱싱할 때는 너무나 화려하고 취한 듯한 색채를 지녔던 이 꽃들이 이제는 부드럽게 빛을 잃어가며 피로한 듯 신주한 색깔을 띠는 것을. 그저께의 오렌지색이 오늘은 밝은 노랑색이 될 것이며 모레는 연한 청동색을 걸친 회색이 될 것입니다. 쾌활하고 순박한 청홍색이 서서히 그늘을 입고 진한 빛을 잃습니다. 지쳐가는 꽃잎들의 가장자리가 곳곳에서 둥그렇게 말리면서 부드럽게 주름이 잡히고 흐릿한 흰색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고 서글픈 회적색을 띱니다. 그런 색들은 우리가 증조모의 빛바랜 비단옷이나 오래되어 퇴색한 수채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친구여, 꽃잎의 뒷면도 유심히 보십시오! 줄기가 꺾일 때면 문득 완연한 모습을 드러내는 이 뒷면에서도 이러한 색채 변화의 유희, 천국으로의 여행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점점 더 정신적인 것을 향해 소멸해가는 과정이 화관 자체에서보다 훨씬 더 향기롭고 경이로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선 평소 꽃의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잃어버린 색채들, 기묘한 금속성 내지 광물성의 색조를 띤 색채들이 꿈을 꿉니다. 이 색채들은 높은 산의 암석이나 이끼 혹은 해조류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회색과 회녹색, 청동색 같은 것들입니다. 분명히 당신은 그런 것들을 높이 평가할 줄 압니다. 어느 해 빚은 고급 포도주의 독특한 향기 혹은 복숭아나 아름다운 여인의 살갗에 난 솜털의 유희를 평가할 줄 알 듯 말입니다. 내가 권투 선수보다 더 섬세한 감각과 더 영적인 체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당신이 나를 감상적인 낭만주의라 비웃지는 않겠지요. 내가 시들어가는 백일홍의 색채에 열광하든, 아니면 슈티프터의 들꽃이 보여주는 스러지는 아름다움에 열광하든 말입니다. 그러나 친구여,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소수의 종이 되었습니다. 축음기를 다룰 줄 아는 것이 음악성이라 생각하고 번쩍거리는 자동차를 아름다움의 세계에 포함시키는 오늘날의 미국인들에게 한번 시험해보십시요. 그저 즐길 줄만 아는 그런 반 인간들에게 꽃의 죽음, 즉 장밋빛이 연회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가장 생동적이고 감동적인 것으로서, 모든 삶과 아름다움의 비밀로서 체험하는 기술을 가르쳐보십시오! 그들은 놀라워할 것입니다. (192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