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기의 즐거움과 괴로움/헤르만 헤세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과 괴로움/헤르만 헤세
오늘 나는 호숫가의 녹색 벤치들 중 하나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볼품없고 딱딱한 이 벤치들은 먼지 덮인 자갈밭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할 일 없는 건달이나 외지인들이 와서 거기 앉았다. 나는 여러 해 전부터 호숫가의 이 도시를 알고 있고 이따금 몇 달씩 여기 머물기도 하지만 이 지루한 벤치들 중 하나에 건달들과 함께 앉고 싶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좀 익숙해져서 오늘 한 시간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오경이었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신 햇빛에 눈을 깜박이면서 나는 호숫가의 돌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파란 호수가 짙은 녹청색 줄무늬를 만들면서 반짝거렸고 멀리 범선 두 척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초록 호반은 굳센 팔로 호수를 껴안았다. 그리고 남쪽 하늘에서는 반짝이는 여름 구름들 사이로 눈 덮인 산정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주 조용한 시간이었다. 나는 눈을 껌벅이다 반쯤 졸기도 하면서 벤치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멀리 떠가는 범선을 이따금 눈으로 좇았다. 가까이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번은 청년이 지나갔다. 양모 스웨터를 입고 스포티한 차림을 한 잘생긴 청년이었다. 청년의 긴 머리칼이 부드러운 바람에 너풀거렸다. 그러고는 어린 소년 하나가 지나갔다. 일고여덟 살쯤 돼 보이는 소년은 지루한 자갈길을 걷는 것이 싫은지 호수를 둘러싼 돌담 위로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소년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장난감 권총을 연신 장전했고 정확히 다섯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방아쇠를 당겼다. 전쟁이나 인디언과의 싸움에서 영웅이 되는 꿈을 꾸는 듯한 아이는 리드미컬한 동작을 하면서 끝없이 이어진 담장을 걸어갔다.
어린 아이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지고 멀리 작은 점처럼 보이게 되었을 때 나는 오늘이 그림 그리기에 좋은 알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정말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날이라서 공기와 물, 땅과 수풀은 마법의 입김을 입은 듯했고, 모든 것이 우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화가들이 눈앞의 대상들을 사랑하게 되는 날,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고 일회적인 아름다움을 띠고 있어서 화가들로 하여금 표현의 충동을 느끼게 하는 날, 가장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에까지 고요한 후광 같은 향기와 매력이 감도는 날이었다.
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무한히 긴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가! 얼마나 여러 달 동안 이 즐거움 없이 지냈던가! 무미하고 어둠침침한 겨울 동안 이 도시는 수많은 여행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 곳에서 나는 책을 읽고 일을 하며 지내느라 반년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매혹적인 인상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은밀하면서도 흥분된 싸움을 벌이지도 않았다. 여행을 하고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시골에서 여유롭게 생활하면서 조용한 풍경 속을 홀로 자주 거닐고 나 자신에게 침잠할 수 있어야 했다.
오, 그림 같은 대기가 갑자기 나를 감싸며 자극한 그 순간, 그림을 그리며 지냈던 지난여름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얼마나 어리석게도 내 화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 도시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지! 얼마나 많은 봄날을 헛되이 흘려보낸 것인지! 갑자기 내 앞의 모든 것이 그림처럼 보였다. 발아래 자갈 바닥이 희미하게 분홍빛을 띠었고 호수의 범선들은 황토 빛과 오렌지 빛으로 반짝였다. 잔물결이 이는 물가의 수면은 가득 짜놓은 물감이 서로 조금씩 섞여 들고 있는 팔레트처럼 보였다. 수정처럼 맑은 청록색 수면이 높은 금속성 음처럼 차갑고 밝은 노래를 불렀고, 밝게 빛나는 녹색 나무들과 그 아래 짙은 그늘 사이에서는 조그만 집들의 침착한 담들이 앞다투어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여기, 이 도시, 이 황량한 호숫가,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오, 내가 테신의 집에 있다면! 내 화구와 함께 우거진 밤나무 숲의 그늘 아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소망이었다. 나는 테신을 떠나 도시에 있었다. 그리고 내 숙소의 보잘것없는 조그만 팔레트에는 몇 달째 먼지 덮인 물감이 굳은 채로 있었다.
나는 기분이 우울해져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은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잠시나마 수채화 물감으로 장난을 쳐보고 싶었다. 나는 친구나 수집가에게 줄 조그만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동화의 삽화를 만들거나 꽃이 있는 풍경에 시를 써 넣는 것도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집으로 갔다. 마음은 들떠 있었고 물감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밝은 햇살에서 벗어나 서늘하게 그늘진 집의 문으로 들어섰고 계단을 올라 현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푸른 햇살이 비치는 바깥과 달리 내 방 안에는 서늘한 빛이 감돌고 회색 진주알 같은 그림자가 아름답고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책상 한가운데에 너무나 사랑스런 색채가 싱싱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친밀한 색조들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그것은 꽃이 세 송이 달린 목련 가지였다. 한 송이는 서서히 시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활짝 피었으며 나머니 하나는 아직 봉오리를 다물고 있었다. 바깥 부분은 자주색이지만 안쪽은 하얀 비단 같은 이 꽃들은 놀랍도록 아름답게 하늘거렸다. 그늘진 회색 방 안에서 이 꽃들은 영혼을 품고 있는 것 같았고, 벽에 걸린 그림들의 몇 가지 희미한 색채들만이 꽃들의 울림에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고 매혹된 심정으로 꽃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 꽃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제 나는 한 친구의 정원에서 기쁜 마음으로 그 꽃들을 꺽어 집으로 가져왔던 것 같다. 다채로운 빛을 발하는 싱싱한 무엇을 방 안으로 가져와 세심하게 물을 주고 잘 세워놓으면서 무척 즐거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꽃들이 얼나마 아름다운지, 꽃들의 다채로운 색깔이 얼마나 복된 빛을 쏟아내는지, 활짝 핀 꽃들이 죽음을 예감하며 부드럽게 살진 봉오리로 기우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보라색과 분홍색과 은은하고 서늘한 흰색의 꽃잎이 유연하게 굽으며 살며시 말리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일회적이고 짧으며 무상한 것인지, 그리고 그 모습을 내가 그릴 수 있고 그려야 하며 아주 서둘러 열렬한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을--바보 같은 나는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 알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온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의자에 모자를 벗어던진 나는 얼른 물 한 잔과 수채화 물감 팔레트를 가져왔다. 그리고 먼지 덮인 물감 덩어리가 소생하기를 입술을 핥으면서 기다렸다. 나는 황연색과 베로나 녹색, 빨간색과 군청색이 물기를 머금으며 서서히 녹아서 윤기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서둘러 자리를 잡은 나는 이탈리아제 도화지 한 장을 펼치고 붓을 물에 적셨다. 그러고는 물기 머금은 팔레트의 묽은 물감을 붓에 찍었다. 붓에는 흐르는 자주색을 묻히고 손가락에는 분홍색과 하얀색을 묻힌 나는 침묵하고 있는 아름다운 세 송이 꽃에만 정신을 쏟았다. 하지만 도화지가 너무 빨리 젖어들어 엉망이 되자 찢어버리고 새 도하지를 가져왔다.
책상의 꽃 옆에는 우편물이 놓여 있었다. 저녁 식사 초대장과 피에졸레에서 온 카드 그리고 판지로 싸서 끈으로 묶은 책 두 권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지 않았다. 목련과 내 도화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잎사귀의 뾰족한 끝에서 활짝 웃고 있는 연녹색과 어두운 배경 속의 암시적인 색채들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행복과 긴강감에 들떠서 연신 도화지에 붓질을 했고 꽃 안쪽의 흐릿한 심연을 뚫어질 듯 보고 나서는 청홍색의 물 속에 서둘러 붓을 담갔다.
나는 새 물을 떠오기 위해 방 밖으로 한 번 나갔다. 그리고 서랍에서 하얀 물감 튜브를 꺼내기 위해 한 번 일어났다. 유감스럽게도 흰색이 없이는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밖에는 한 시간 내내 그림을 중단하는 일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고 내 정신이 아니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색을 칠하고 물을 바르고 붓을 씻어냈으며 파란색을 조금, 노란색을 조금 더 칠했다가는 이내 적은 붓으로 다시 색을 옅게 했다. 오, ㅅ이 세상에 그림 그리기보다 더 아름답고 중요하고 행복한 일은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은 어리석은 시간 낭비였고 헛된 짓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굉장한 것이었고 소중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배경에도 뭔가 특징을 부여하려 했다. 그런데 회녹색을 찍은 붓이 실수로 물기 많은 자리로 미끄러졌고 물감이 번져서 흐릿한 줄이 여러개 생겼다. 나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것들을 지우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림의 모든 구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쪽 구석을 보면 색깔들의 가장자기가 너무 짙고 보기 싫게 응어리져 있었다. 다른 구석에는 밝게 남아 있어야 할 부분이 회색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놀란 나는 불안하고 성급한 마음으로 붓질을 해댔다. 전체 화면이 너무 빨갛기만 하고 파랗고 서늘한 인상이 부족한 게 아닐까? 하얀색을 쓰지 않은 건 너무 멍청한 짓이 아니었을까? 아, 게다가 어떻게 잎 그늘과 배경에 똑같은 군청색을 칠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저런 실수가 자꾸 눈에 띄어서 나는 연신 물을 찍어 발랐다. 오 이런, 나는 너무 서둘러 그림을 그렸고 이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붓을 내려놓았고 도화지가 마를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마침내 도화지가 말랐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가 그첢 아름다운 꽃을 보고 그려낸 것은 완전히 엉망인 그림이었다. 우글쭈글한 도화지에는 지저분한 얼룩밖에 없었다. 종이와 물감이 아까웠고, 덧칠을 헤대면서 더럽힌 물조차 아까웠다.
나는 물감으로 더럽혀진 종이를 천천히 찢어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그림그리기보다 더 위험하고 어렵고 실망감만 주은 일이 또 있을까? 이보다 더 까다롭고 희망 없는 일이 있을까? 목련을 그리려는 시도는 돈키호테나 햄릿 같은 작품을 써보려는 시도만큼 주제넘은 일이고, 결국 하찮고 유치한 놀이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새 도화지를 책상에 펼쳤고 붓 두 자루를 물로 씻어내고는 새 물을 떠왔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