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류작가의 죽음 앞에서
어느 여류작가의 죽음 앞에서
주변 상황으로 인해 책을 가까이 할 수 없었든, 내면의 혼란과 고민으로 글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든 간에 그런 날은 온통 하루를 망쳐버린다. 물론 가슴으로 전해지는 문장에 흠뻑 빠진 날 또한 불안할 때도 있다. 문학과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다. 책만을 붙들고 살 수 없는 입장이기에 돌아오는 그 길은 빠졌던 관념의 깊이만큼이나 더디다.
나의 삶은 이렇듯 늘 이중적이며 모순투성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선택이 분명해야 한다. 중립에 놓여 있는 상태를 견뎌내지 못한다. 욕망이 큰 탓인지도 모른다. 가치관이며 인생관이 정립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뿌리가 깊지 못한 나무처럼 작은 비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거나 쓰러지는 나약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떨쳐 내지 못하는 문학과 조화하는 방법, 그것은 이상과 현실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아니면 적당히만 껴안는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껴안을 생각만 했다. 철저한 것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했다. 아직도 어떻게 문학을 현실과 조화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술이라는 것이 ‘중용’이라는 것으로 가능할까. 만족할 수 있을까. 문학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과연 답이 있을까. 말과 생각에서 빚어지는 것 이상을 요구하는 그것에 그 누구도 정답을 제시하지 못할 것 같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돈을 벌기 위한 발걸음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도 있다. 남편이 아이들을 나무라는 말 속에 나에 대한 간접적인 원망이 섞여 있는 듯해 주춤한다. 과연 내가 책에 몰두하고 글을 쓰려는 목적이 뭔가.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답을 할 수 없다. 그저 '좋아서, 행복하니까'라는 말은 현실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사람인 듯해 모든 것에 자신감이 없어진다. 나의 행복이 어느 한쪽의 희생이거나 눈물 위에서 구축되는 것이라면 그 무슨 소용 있을까.
어느 젊은 여류작가의 아사 사건이 슬프고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