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발자취*

[스크랩] 빈집/ 기형도

아리솔솔 2010. 2. 16. 09:11

어느 날 내 모든 것이었던 사랑을 잃고 할 수 있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랬을 테지요. 사랑을 잃고 사랑의 절망 속에서 분명 그도 그랬을 것입니다.

분명 시인도 김용택이 선운사의 살얼음 낀 시냇물을 맨발로 건너가며 그 시림을 잘 참아 내다

그깟 동백 때문에 와르르 한순간 무너져 눈물을 흘렸듯이 그도 잘 견뎌보려 이를 악물었을테지요.

그러다 결국 흰종이로도, 그리움에 서성대다 대신하던 눈물로도,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자신의 몸 안에 그 어쩌지 못할 가련한 사랑을 문을 잠그고 간직하게 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때때로 사는 일이 그런가 합니다.

끌어안고도 다 잃던가, 다 내어주고도 다 얻든가,

다 내어주고, 다 얻고, 다 잃고.. 하던가.

 

그러기 위해서 자기 몸 안에 누구나 빈집, 빈방 하나 들여놓고 사는거지요!

그 빈집에 군불을 때던지, 텅텅 소리가 나는 울림증을 간직하던지.

그런 의미에서 기형도의 빈집은 우리 모두의 방이기도 한 듯 합니다.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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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奇亨度)(1960. 2.16 -1989. 3,7)

 

스물 아홉의 짧은 생을 살다 뇌졸증으로 죽어간 시인 기형도.

삼류극장의 심야영화를 보다 후미진 객석에서 스르르 연극 속 외로운 주인공처럼 죽어간 시인.

연극이 끝난 뒤 객석에 불이 켜지고 모두가 떠난 그 자리에서 기어코 일어나지 않았던 남자, 기형도.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쩍 하고 벌어지는 것일까요?

문학 평론가 류산님이 말하길 그의 시는 이미 신화의 궤도에 진입했다고 평한 바 있지요.

죽음을 통해 다시 신화로 환생하는 끈질긴 저력, 불사의 시!

실로 그의 시는 끔찍한 아름다움이 있다.라고 끔찍하게 아름다운 찬탄을 보냈는데

그 아까운 천재 시인은 우리 곁을 너무 빨리 떠나고 말았군요.

그의 시 노을의 끝부분에 '펄펄 살아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하고 외친 젊은 시인의 소리가

제 안에 여러 날 돌며 울리던 쓸쓸한 마음이 다시금 아프게 되살아나며

펄펄 살아 있어주길 소망하는 제 마음 하나가 이 시대 선을 하나 확실히 긋고 떠난 시인을 생각하니

덧없이 애잔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도 오늘 같은 날 쓴 듯한 가는 비온다 중 한 귀절도 역시 제 맘을 후려치곤 했습니다.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시인 기형도, 그는 지금쯤 어디서, 어느 비오는 젖은 길을 걸어 우리에게 오고 있을까요? 

출처 : 온우리
글쓴이 : 차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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