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이 작품은 수필일까, 소설일까?

아리솔솔 2010. 1. 28. 16:26

-생각해 보기-

이 작품은 수필일까, 소설일까?
수필로 보는 이유?
소설로 보는 이유?



먹 배

오세윤(수필세계 필진)


중국 문학기행 이틀째, 이백(李白)의 고리(故里)인 강유(江油)에서는 특히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모든 음식에 고수라는 독특한 향초가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기름끼 때문인지 느글거려서 입에 댈 수가 없었다. 여행 첫날, 성도(成都)에 머물면서 사천요리의 진수를 맞본 때문이라 더했는지 모른다.
세 쌍의 부부가 낀 일행은 총 인원 24명, 절반쯤이 낯이 설었다. 그날 저녁 식사시간에는 우연하게도 초면인 박태기선생 부부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엊저녁, 식사를 끝낸 뒤 가진 각자 소개에서 박선생은 Y대 중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했다. 어눌한 말씨와 구순한 인상에 더하여 부인의 조신함으로 해서 특별히 호감이 갔다. 멋인가? 머리카락이 오른쪽 이마 한 부분을 덮은 게 조금 눈에 거슬리기는 했다. 그러나 호감은 겨우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여덟 명이 앉아 먹는 회전식 두레상 위에 그래도 먹을 만한 것은 야채와 함께 볶은 돼지고기와 닭다리 껍질튀김 뿐이었다. 사전지식이 있어서였는지 박선생은 음식이 날라 오기 무섭게 돼지튀김만을 듬뿍 떠서 자기와 부인의 앞 접시에 옮겨놓고 꾸역꾸역 먼저 먹어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몇 조각 남은걸 먹어보고서야 입에 맞는 걸 알고는 한 접시를 더 시키기는 했지만 그것도 나오기 무섭게 바로 박선생이 자기네 접시로 선뜻 옮겨가고 만다. 고약하긴 했어도 동행이요 초면의 예의상 60이 다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무어라 나무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뒤틀린 속을 그냥 두고 넘어가기도 그리 쉽지 않아서 한마디 했다.
“식욕이 대단하십니다. 박선생.”
커다란 고기조각을 먹다말고 흘낏 나를 쳐다본 박선생이 어벌쩡 웃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네, 아직은 좋은 편입니다요. 여행 나오면 먹는 게 남는 거지요, 많이 드세요. 안 먹으면 손해예요.”
“어렸을 때 별명이 ‘먹배’였대요. 평소에도 식사를 참 잘하셔요.” 곁에 앉은 부인이 한 술 더 뜬다. 부인에게서 ‘먹배’라는 별명을 듣는 순간, 갑자기 내 머릿속 깊숙이에서는 아득한 기억하나가 꼼틀거리며 기어 나와 곁에 앉은 박선생을 곁눈질로 훔쳐보게 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채 한달이 안 되어 6.25전란이 일어났다. 다음날부터 당장 학교를 못 가게 됐다. 열흘남아 집에서 놀고 있자니 보통 심심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멀리 나가기도 두려워 고작 동네아래 형무소 앞 전차종점에나 나가 노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잠깐 놀고는 일찍 들어와야 했다. 거리풍경도 낯설게 바뀌었다.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핸들에 빨간 리본 같은 헝겊을 질끈 동여매고 다녔다.
한주일이 지나서야 아버지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듣고 정세도 알아보아야 하겠다며 자전거를 끌고 대문을 나섰다. 물론 어머니의 사전답사로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뒤이기는 했다. 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자전거에도 예외 없이 붉은 헝겊조각이 옹골차게 매어져 있었다. 의아해서 어머니에게 여쭸다.
“아버지도 사상가야?”
놀란 어머니가 누가 들을세라 얼른 내 입을 틀어막으며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넌 무슨 소릴 그렇게 하냐? 아 이북에서 살다가 이남으로 내려왔을 뿐인데 아버지가 무슨 사상가냐.”
“그럼 왜 자전거에.......”
“그렇게 안하면 잡혀갈지도 모를까봐 겁이 나서 엄마가 해 드렸다” 어머니는 신산하게 한숨을 내려 흩트리며 공포에 질린 눈을 걱정스럽게 떨었다. 어머니는 열린 대문을 서둘러 지쳐 닫고 빗장을 잠갔다.
하루는 3학년 선배가 집으로 찾아왔다. 공부도 해야 하고 배울게 많다며 학교에 나오라고 했다. 전혀 낯이 없는 선배였다. 하루를 더 머뭇거리고 망설인 끝에 별일이야 있으랴싶어 그 다음날 아침 만리동에 있는 학교로 갔다. 교문을 들어서는 학생은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띄엄띄엄 걸어오는 아이들에 섞여 교문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을 바라다봤다. 점차 푸른색이 짙어지는 플라타너스의 넓고 푸른 잎이 시원한 바람소리를 내는 운동장은 휑하니 비어 마치 시골소학교의 일요일 오전처럼 한적하게 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체육시간에 체조를 하고 공을 차던 운동장,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한 함기용 선수와 3등을 한 최윤칠 선수가 이 학교출신이라며 월계관을 쓴 그들을 단상에 올려놓고 모든 학생들이 가득 차게 모여 자랑스럽게 환영회를 하던 운동장이 빈 들판처럼 덩그렇게 비어있었다.
교실에 들어섰다. 낯이 설었다. 곰팡이냄새가 났다. 학급당 10여명쯤씩 나왔다. 얼마간의 불안감을 애써 감추고 태연한 척 떠드는 그들의 얼굴에서 나는 새로 시작해 얼마 안돼는 중학생생활을 그냥 포기할 수 없어 나왔다는, 아쉬워하는 속내를 읽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은 왜 나왔을까, 호기심과 궁금증일 터였다. 호기심과 기대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청소년기의 억누르기 힘든 유혹인 게 확실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선배들을 모두를 강당에 모이게 하고 노래를 가르쳤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을 배웠다. 모처럼 나온 데다 오랜만에 부르는 노래라 그래도 신명나게 불렀다. 불안감을 떨쳐버리는 데는 군중 속에 파묻혀 그들과 하나가 되고 함께하는 게 제일 빠르고 쉬웠다. 두 시간쯤 배우고 나서 모든 학년이 운동장에 집결했다. 대오를 맞춰 구보로 종로에 있는 수송국민학교로 갔다. 선배들은 대열의 바깥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같이 걸으면서 이탈자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폈다.
학교운동장에는 시내의 다른 학교 학생들도 속속 모여 들었다. 다시 노래를 불렀다. 점심시간, 선배들이 빵과 사이다를 나누어 주었다. 별미였다. 노래를 더 부른 뒤 몇몇 학생대표들이 단상에 올라가 웅변을 토했다. 박수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뒤에 서있던 고학년 학생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앞으로 나갔다. 의용군에 지원하는 용감한 학생들이라고 했다. 운동장이 떠나가라 박수들을 쳐댔다.
사상 때문일까, 아니면 군중심리에 들떠 충동적으로 결정한 걸까. 앞으로 나가는 사람 중에 바람잡이는 없었을까.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5시에 해산해서 바로 집으로 왔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아버지가 다음부터는 절대로 학교에 나가지 말라고 엄하게 명했다
인민군 치하 3개월은 모두가 무서웠다. 어른들은 저녁마다 있는 학습에 풀죽처럼 시달렸다. 밤낮없이 동원되는 부역으로 몸과 마음이 파김치로 시들어 갔다. 쌕쌕이는 매일처럼 날고 비행기의 기총소사와 폭격은 일상처럼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어른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우리들은 배고픔을 달래는 것만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명아주를 뜯어 삶아먹고 설사를 했다.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견디던 날의 여름 해는 원망스럽게도 길었다.
날아가고 나서야 들리는 쌕쌕이(제트 비행기)의 날카로운 비행 음(音)은 소리 자체로 공포였다. 붉은 노래도 강제로 배워 불러야했다. 어제까지 함께 놀던 동식이의 죽음에도, 모여 앉은 채 폭격으로 몰살당한 이웃의 참혹한 죽음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배만 고팠다.
9월 초순, 그런 와중에 황금어장이 발견됐다. 서대문 형무소 붉은 담벼락 밖, 큰길에 면한 검도장의 아래층 반 지하창고에 숯가마가 가득 쌓여 있는 걸 골목에 사는 한 녀석이 눈독을 들였다. 횡재였다. 신작로에 면한 축대는 길반 높이 정도여서 기어 넘기도 만만했다. 유리창도 깨진 곳이 많아 들어가기도 수월했다. 보초를 서는 인민군도 한사람밖에 없었다. 저녁 어스름에 깨진 창문을 통해 숨어들 듯 들어갔다. 수수깡으로 엮은 숯가마를 헤치고 한 포대씩 갖고나와 잽싸게 담을 넘었다. 골목어귀에 있는 부침개 아주머니에게 건네주고 받는 빈대떡은 그 저녁 식구들의 충분한 한 끼 식사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침개가게 앞에서 우는 아이를 야단치는 낯선 아주머니를 봤다.
“먹배 너 이 녀석 또 여기 있었구나, 엄만 돈이 없어. 어서 가자, 못 사준다니깐-.”
“싫어, 배고파. 엄마~”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아주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으며 서럽고 기진한 소리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숯을 건네고 부침개를 받는 걸 보자 아주머니가 물었다. “어디서 난 거니?”
머뭇거리는 나를 보자 부침개 아주머니가 대신 답했다. “길 건너 형무소 창고라우”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가 아이를 달래면서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했다. 총에다 칼까지 끼우고 순찰을 돌고 있어서 들키면 큰일 난다고 말해줬다. 그래도 데려가 달라고 했다. 아이는 치마폭에서 아주 잠깐씩 고개를 돌려 내 눈치를 살피고는 도로 치마에 얼굴을 묻으며 마른 울음소리를 냈다. 그 간절한 눈빛에 할 수없이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를 데리고 한 번 더 담을 넘었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순찰병의 눈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포대에 숯을 담기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창문을 빠져나오다 그만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깨진 유리창에 긁힌 아이의 이마에서는 피가 낙숫물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죽어라하고 울어댔다. 순찰병이 달려와 총검을 들이댔다.
“이 쌍 간나이 새끼들, 잘 걸렜다. 인민의 재산을 훔쳐? 멫 번이나 훔텬네?”
“아니어요 인민군 동무, 처음이어요.”
“뭐, 동무? 날래 미드라고? 뉘기가 믿으란?”
“정말이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아주머니는 새파랗게 질려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만 있었다. 아이는 계속 울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할 방법은 내가 찾아야 했다. 처음 나에게 데려가 달라고 사정할 때의 그 굳게 사려 잡던 얼굴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민군 동무, 나도 같은 동무예요. 김일성 장군 노래도, 빨치산 노래도 할 수 있어요.”
“무시기 소리?”
인민군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
끝내기 무섭게 연이어 불렀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
노래를 부르면서도 눈으로 인민군의 표정을 치밀하게 살폈다. 마치 밤공기 속, 위험을 가늠하는 나방이의 더듬이처럼 있는 대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병사의 숨소리를 살폈다. 병사의 얼굴이 한결 누그러졌다. 노래가 다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아주머니가 두 팔을 들더니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 조선 인민공화국............”
눈이 둥그레진 인민군이 한 손으로 아주머니를 제지했다. “됐시요, 고만 하라요. 아 새끼 피나 멈추게 하시구레.” 말투가 부드럽게 누져 처졌다. 그 틈을 타서 다시 한번 더 용서를 빌었다. 절호의 기회란 두 번씩 찾아오기 힘들다는 걸 나는 안다. “용서해 주세요, 인민군 동무. 잘못 했어요.”
“알갔다, 알갓스니께니 날래 가라우야.”
제법 어른스럽게 인민군이 민간인처럼 말했다. 아주머니를 일으켜 세워 서둘러 나오는데 뒤에서 순찰병이 우리를 불렀다. “이거 안 개지구 가간?”
숯이 담긴 두개의 포대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인민군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노래방으로 모두 모여 들어가 앉았을 때 나는 일부러 박선생 곁에 앉아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부인은 고단하다며 먼저 숙소로 올라갔다.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 귀에다 입을 대고 큰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이 여행에 끼게 되었습니까?”
그가 예의 어눌한 어투로 허방지게 웃으며 대답한다. “지난해에 담도암이라고 해서 쓸개를 떼어냈어요. 회복이 빨랐지요. 마침 금년이 제 회갑이라고 집사람이 데리고 왔어요. 하하” 머쓱한 듯 손으로 이마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언뜻 들어난 이마에는 길게 난 흠집이 불빛에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서늘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가 계신가요?”
박선생은 의아한 듯 나를 한번 쳐다보기는 했지만 지나가는 인사이겠거니 생각했는지 순순하게 답해준다. “네, 그럼요. 조치원에 혼자 계신 걸 2년 전에 모시고 올라왔지요.”
조치원? 그러면 다른 사람을 잘못 짚은 건가. 확인하듯 물었다. “고향이 조치원인가요?”
“아니지요, 태어나긴 서울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말씀으로는 6.25때 하도 험한 꼴을 당해 그길로 나 하나만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오다 조치원에서 수복을 맞았다고 해요.”
수복이 되고도 어머니는 다시는 서울에는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바람에 자기도 그곳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대학만 서울에서 나왔다고 했다.
“치매에 들지 않으셨으면 서울로 모시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때 무슨 꼴을 당했었는지 요즘 나를 보시면 자주 ‘인민군 동무’하기도 하고 때로는 ‘맥아더 장군님’ 하고 부르기도 해요. 그러다간 또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시고는 하지요.”
탁자위에 그득히 쌓인 맥주병이 하나둘씩 비워가는 것과는 반비례로 방안의 열기는 점차 더 가득 무르익어갔다. 말을 마친 박선생이 손바닥으로 두어 번 뺨과 턱을 문지르고 나더니 일어나 나가 마이크를 집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훌쩍 덩치가 커버린 ‘먹배’가, 자지러지는 울음을 그친 먹배가 어깨를 비틀어 감으며 ‘비나리는 고모령’을 구성지게 불러대기 시작했다. 착잡했다. 슬그머니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간신히 등 하나만이 을씨년스럽게 켜져 있는 정원으로 내려섰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하늘, 별도 없이 흐린 하늘이 썰렁하게 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