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인을 찾아*

정지상과 김부식

아리솔솔 2009. 8. 28. 20:22

-역사의 라이벌-

 

 

정지상(? ~1135)과 김부식(1075~1151) 이 두 사람은 모두 고려의 제17대 황제인
인종(1122~1146)연간에 활약한 사람들이다.
개경출신이었던 김부식이 먼저 조정에 출사하게 됐는데 청년시절 김부식은
개경에서 문사(文士)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사실 부식이라는 이름도 중국의 천재 시인인 소식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동생 역시 소철의 이름을 따서 부철이라고 했다고 한다.

어쨌든 김부식이라는 이름만 놓고 보아도 시에 대한 김부식의 열정과 집착을 짐작할 만하다.
그렇게 개경문단에서 김부식이 명성을 떨치고 있을 즈음 서경출신이던정지상이

뒤늦게 과거에 장원급제하면서 개경에 등장하게 된다.

그 역시도 대단한 시재였으니 드디어 김부식이 호적수를 만난 셈이 되었다.
이때에 정지상이 지은 시가 바로 그 유명한 [송인 送人]이다.
이시는 금방 개경에 퍼져 나갔다. 그리곤 이내 인구에 회자된다.
당연히 김부식의 귀에도 이 시가 들렸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정지상은 개경문단에 파란을 일으키며 전격 등단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조정에서는 물론 시회(詩會)에서도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즈음 두 사람이 갈등하게 되는 결정적 사단이 발생한다
이 당시 정지상의 시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절간에 염불소리 그치니
하늘빛 바로 맑은 유리로세

바로 이시를 접한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마지막 자구를 자신이 맞추겠으니
시를 빌려달라고 간곡하게 청을 넣었다. 그러나 정지상은 김부식의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더이상의 기록이 없으므로 상세한 내막은 알순 없으나
[고려사절요]에 참고할만한 기록이 나온다.
" 김부식은 본래 문인으로서 정지상과 같이 명성을 날렸는데 문자관계로 인해
불만이 쌓여 있었다 .... 중략 ..... 이 감정은 뒤에 그를 죽이기까지 했다 "
다소 과장된 표현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정지상과 김부식이 문장에 있어서
적잖은 갈등을 가지고 있었음을 유추해볼수 있다.
한편 조정내에서는 당시 권세를 부리던 이자겸을 축출하는데 김부식이 결정적 공헌을 하였고

바로 이 이자겸을 척살하는데 세운 공으로 전횡을 일삼던 척준경을 적극 탄핵하여 축출시킨 인물이 바로 정지상 이었다.

이로인해 이 두사람에 대한 인종의 신임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럴 즈음에 역사상 유명한
묘청의 난이 발발한다.

서경천도와 함께 진정한 황제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라던 묘청과 그의 무리들이 서경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에 정지상도 백수한과 함께 묘청의 거사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당시 정지상은 인종의 경연까지 전담하고 있던터라 매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난은 결국 실패로 끝이난다.

그런데 바로 이 난을 진압한 진압군의 총사령관이 바로 김부식이었다.

문장에서의 갈등이 결국은 서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되면서 완전히 적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김부식은 난을 진압하면서 가장 먼저 정지상을 처형하였고, 그의 자녀들의 몸에 [서경역적]이라는 글자를 새겨서 자신의 종으로 삼았다.

김부식의 정지상에 대한 원한이 어떠했는가를 미루어볼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그후 최충헌의 집권이 이루어진 13세기초에 들어오면 이규보의 [백운소설]이
나오게 되는데 여기에도 보면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문장에 있어서 혼나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역사의 엉뚱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토록 문장에 집착했던 김부식이었건만 정작 그의 문집은 전해져 오는게 단 한권도 없다.
(김부식에게는 문집 20 여권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정지상은 고려의 12시인중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