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李德懋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정조 연간의 학자이자 시인이자 산문가이다. 한성 중부 관인방 대사동(현재의 종로2가 북쪽)에서 태어나 평생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그의 본관은 전주 이고, 자는 무관이다. 영처, 청장관, 선귤당, 형암, 매탕, 아정 따위의 호를 번갈아 사용하였다. 왕실의 후예이기는 하지만 서얼이었기에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한계가 있었으나 정조의 특별한 배려로 검사관에 발탁되었다. 이덕무는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일 뿐만 아니라, 또 시인으로서 조선 후기를 대표한다. 유득공, 박제가 등과 더불어 그 이전의 시풍과 뚜렷히 구별되는 새로운 시풍을 창출하여 백탑시파(白塔試派)를 형성했다. 그의 존재는 산문 분야에서도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는 조선 산문사에서 배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 학자로서 지닌 명성에 가려 산문의 찬란한 세계는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고문가(古文家)의 입장을 견지한 논자들에게 그의 산문이 소품문으로 취급받아 아예 논의대상에 포함되지 않아서 그런 대접을 받았다. 오랜 동안 그의 산문은 정통 산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고문(古文)을 제외하곤 소품문이 산문의 권위적 세계에 한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전형적인 소품문인 이덕무의 산문이 폭넓은 감상의 대상이 되고 미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 산문사에서 그의 산문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다. 그만큼 혁신적이고 아름답다. 이덕무의 산문은 전형적인 소품문이다. 소품을 극도로 질시했던 정조는 그를 두고 "이덕무, 박제가, 따위는 그 문체가 완전히 패관소품에서 나왔다. 이들을 내각(內閣)에 두고 있다고 해서 내가 이들의 문장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들은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이런 문장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나는 사실 그들을 배우로서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처지가 남다르다는 것은 이들이 서얼신분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서얼로서 입신(立身)의 길이 막혀 있어 소품문과 같은, 정통에서 벗어난 글을 써서 자기 존재를 알리려 했다는 지적인데 일리가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이덕무를 비롯한 박제가 등이 소품문을 적극적으로 창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덕무가 소품문을 즐겨 창작한 시기는 20, 30대 젊은 시절이었다. 10대부터 그는 명말청초의 참신한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공안파와 경릉파의 글을 비롯하여 이어(李漁) 등의 산문을 폭넓게 흡수하였다. 그의 독서범위는 대단히 넓었지만, 소품문을 창작한 문학그룹과 작가를 탐독하였다. 이덕무는 10대의 습작기를 거쳐 20대에 벌써 자기 고유의 빛깔과 색채를 지닌 독특한 소품문을 창작해냈다. 그의 창작열은 대단하였고, 문학적 성취는 발군이었다. 20대 초반에 그의 명성은 문단에 가득하였다. 소품문을 잘 짓는 작가로서 이덕무의 존재는 문단에 뚜렷하게 부각되었고, 전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이렇게 젊은 시절에 창작되었다. 그의 소품문은 영역이 넓어서 주제도 다양하고 문체도 다양하다. <이목구심서>,<선귤당농소>, <세정석담> 따위의 청언소품집은 맑은 정취를 보여주는 품격 높은 글이고, <서해여언>과 <칠십 리 눈길을 걷고> 따위의 유기는 여행의 정취를 잘 살린 빼어난 명작이며, 또 척독은 풍부한 서정과 기지를 담아낸 편지글로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윤회매십전>을 비롯한 <내게 어울리는 인생의 예찬>, <섭구충 이야기> 따위의 글은 파격적 회문으로서, 기존 문체로 담을 수 없는 관찰과 감성의 세계를 표현해냈다. 그가 개척한 이러한 산문세계는 이후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쳐 파생작들이 출현하였다. 그가 소품문을 창작한 바탕에는 투철한 창작정신이 깔려 있다. 그 정신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다. 기존의 문학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개척하라. 사물을 대상으로 할 때 선입관을 배제하고 치밀하게 관찰하여 글을 써라. 세계의 가상에 빠지지 말고 인정물태의 진실을 드러내도록 하라. 예민하고 감성적인 언어를 구사하라. 그의 이러한 창작정신은 "진실한 기쁨과 진실한 슬픔만이 진실한 시를 만들어낼 뿐이다"는 주장이나, "진짜에 바짝 다가서고 몹시 닮은 것이라해도 하나같이 제이(第二)의 자리에 머무는 법. / 핍진하고 닮았다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다시 한번 똑똑히 살펴보라! / 본연의 바탕을 먼저 볼 수 있어야 가짜에 막힘을 당하지 않는다. / 온갖 가지 수많은 물상은 이 나비의 비유를 법으로 삼을 것이다"에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나비의 비유'로 집약되는 그의 창작정신은 '진실의 수립'을 향한 그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잘 표현하였다. 통속문학에 물들지 않고 인간정신의 순수성을 드러내려는 그의 정신은 소품문에서 가장 잘 발휘되었다. 이덕무 소품문은 우리 문학사에서 '제 목소리 내기'의 문제와, '낯설게 하기'라는 문학정신을 실천하여, 우리 자연과 당시의 감성을 살려 새로운 글을 창출하였다는 의의를 갖는다.
고전산문 산책에서... |